이차돈 순교와 불교왕국의 태동 ①

▲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묘사한 이차돈의 순교 장면. 좌측에 법흥왕이 있고, 가운데 죽음을 맞는 이차돈이 보인다. 잘린 목에서는 흰 젖이 솟아오르고 어두워진 하늘에서 꽃비가 쏟아지고 있다. <br /><br />/삽화 이건욱
▲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묘사한 이차돈의 순교 장면. 좌측에 법흥왕이 있고, 가운데 죽음을 맞는 이차돈이 보인다. 잘린 목에서는 흰 젖이 솟아오르고 어두워진 하늘에서 꽃비가 쏟아지고 있다. /삽화 이건욱

`불교`를 말하지 않고서는 신라를 온전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이는 많은 역사학자들이 공감하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신라의 불교를 말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이차돈과 법흥왕이 아닐까?

죽음을 통해 신라가 불국토로 가는 길을 연 이차돈과 최고의 권력자에서 승려로 존재를 바꾸는 법흥왕.

527년 발생한 것으로 전해오는 `이차돈의 순교(殉敎)`는 불교 공인이라는 가시적인 변화 외에도 신라사회의 많은 것들을 바꾸어놓았다.

본지는 이차돈과 법흥왕이 살았던 6세기로 돌아가 불교의 신라 유입과정과 변화양상, 신라의 당대 사회상과 생활상을 들여다보는 기획기사를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죽음으로 불교를 전파한 청년 이차돈
`그의 목을 베자 땅위로 꽃비가 내려`
신라사 가장 아름답게 죽은 영웅 `칭송`

왕궁엔 팽팽한 긴장감과 공포감이 떠돌았다.

왕은 수많은 벼슬아치와 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묶여 있는 해사한 20대 청년에게 물었다.

“네가 죽으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그 말을 믿어도 좋으냐?”

청년이 답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게 인간의 목숨이라지만, 큰 뜻과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을 두려워해서야 어찌 장부라고 하겠습니까. 제 죽음으로 이 땅에 불법(佛法)이 바로 선다면 목숨이 아깝지 않습니다.”

잠시잠깐 망설이던 왕은 청년의 목을 베라고 명한다.

위의 장면은 신라의 23대 왕인 법흥왕과 순교자 이차돈(異次頓·506~527)의 마지막 대화를 상상력을 바탕으로 풀어 쓴 것이다.

514년부터 36년간 신라를 통치한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왕권국가의 기초시스템을 구축한 현명한 군주였다. 또한, 그는 신실한 불교도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법흥왕은 함부로 불교의 교리를 설파하고 승려들을 친절하게 대할 수 없었다.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지닌 귀족들 상당수가 불교의 유입을 막고, 공인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차돈은 불교를 받아들일 수도, 내칠 수도 없는 법흥왕의 딜레마(dilemma)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스스로 죄를 뒤집어쓰고 “만약 불교가 자비롭고 옳은 종교라면 내 죽음에서 이적(異跡·신의 힘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남)이 나타날 것”이라며 스스로 처형을 요구했다.

▲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한 `이차돈 순교비`.
▲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한 `이차돈 순교비`.

그래서 정말 `이적(기적)`이 일어났을까?

전해오는 역사서들은 스물한 살 신라청년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먼저 `삼국유사`다.

“옥리(獄吏)가 그의 목을 베니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고, 잘린 머리는 날아가 금강산 산정에 떨어졌다. 하늘은 어두워지고 진동하는 땅 위로 꽃비가 떨어졌다.”

일연(一然·`삼국유사`의 저자)의 드라마틱한 서사방식과는 달리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유학자다운 간명한 어법으로 이차돈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서술은 아래와 같다.

“청년의 목을 베자 피가 솟아났다. 붉은색이 아닌 흰색의 젖과 같았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에 놀라 다시는 불교를 비방하지 못했다.”

삼국시대 불교의 유입과 전파에 큰 영향을 끼친 승려들의 이야기를 담은 `해동고승전`에도 동일한 사건이 다른 방식으로 쓰여 있다.

고려 고종 2년(1215년) 각훈(覺訓)이 묘사한 이차돈의 죽음은 이러했다.

“그의 머리를 베자 금강산정에 날아가 떨어졌다. 벤 곳에서 흰 젓이 솟아나 높이가 수십 길이 되었다. 태양이 빛을 잃고 공중에선 꽃비가 내렸다.”

신념을 위해 자신을 목숨을 내놓는 사람들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그것도 아직 세계관과 철학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다고 판단되는 20대 초반의 나이에. 제 몸을 희생함으로써 자신이 품었던 뜻을 펼치고자 했던 청년 이차돈.

각종 문헌과 구전되는 이야기를 통해 확인하는 그의 단단한 신념은 자연스레 작가 H. 잭슨 브라운 주니어(H. Jackson Brown Jr)가 쓴 문장을 떠올리게 한다.

브라운은 “누구에게서도 희망만은 빼앗지 말라. 그것은 그가 가진 전부일 수도 있다”라고 했다.

불교의 공인과 신뢰했던 법흥왕의 입지 강화라는 `희망`을 위해 생명을 던진 순교자 이차돈.

여전히 `친일논란`에 휩싸여 있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의 최고 지식인 중 하나로 손꼽히는 소설가 이광수(1892~1950). 그는 이미 1세기 전에 이 `젊은 순교자`에게 매료됐다.

이차돈의 생애에 문학·예술적 이미지를 입혀 쓴 장편 역사소설 `이차돈의 사(死)`는 이광수 소설의 변곡점이 된 작품 중 하나다.

▲ 이차돈 순교비에 새겨진 글씨. 마모가 심해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많지 않다.
▲ 이차돈 순교비에 새겨진 글씨. 마모가 심해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많지 않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캔버스 위에 사랑과 고통, 죽음과 정신적 부활이라는 세밀한 작가적 관찰을 덧붙인 `이차돈의 사`는 1935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장편소설이다. 여기서 이광수는 이차돈을 이렇게 평가한다.

“신라사(新羅史)만이 아니라 전 조선의 반만 년 역사를 통하여 가장 아름답게 살고 가장 아름답게 죽은 영웅이다. 16세에 벌써 전장에서 큰 공을 세우고, 21세에 장차 공주와 왕위까지 얻을 수 있는 부귀를 버리고 신라 귀족 전체의 적이 되어 아름다운 순교자의 죽음을 맞았다. 나는 순교자를 사모한다. 내가 순교자가 될 만한 인물이 못되니까 그런가보다.”

`친일`이라는 그림자와 `조선 신문학의 개척`이라는 빛을 동시에 지닌 이광수. 언필칭 `20세기 초반 한국의 거물예술가`로부터 이 정도의 상찬을 얻어낸 다른 역사적 인물이 있었던가? 곰곰이 생각해봐도 쉽게 떠오르지가 않는다.

이광수는 이차돈에 대한 흠모를 드러냄과 동시에 여러 가지 의문도 제기한다. 역시 소설 `이차돈의 사` 서문(序文)을 통해서다.

“어찌하여 스물한 살 이차돈은 천하에 으뜸가는 영화와 연인까지도 버렸나? 어찌하다가 푸른 청춘 꽃다운 나이에 형장의 이슬이 된 것일까? 어째서 법흥왕은 귀애하던 이차돈을 죽일 수밖에 없었을까?”

비단 이광수만이 가진 궁금증이 아니다. 신라와 신라의 역사, 불교의 신라 유입과 이후 신라가 불교국가로 성장했던 과정에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는 크나큰 수수께끼다. 이차돈과 법흥왕을 알아가는 과정은 이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여정에 다름없을 것이다.

 

▲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시기인 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
▲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시기인 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

신라의 불교수용이 늦었던 이유는 뭘까?

고구려보다 155년 늦게 받아들여
토속신앙 믿는 귀족들 반대가 주요원인

신라, 고구려, 백제가 자웅을 겨루며 대립하고 정치·군사적 상황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던 삼국시대. 세 나라는 인접한 국가인 만큼 외국에서 들어온 문화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유사했고, 전래 시기도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왜 불교의 전래와 수용에서는 시기상으로 큰 차이가 나는 걸까?

고구려는 소수림왕이 통치하던 372년에 승려 순도(順道)가 가지고 들어온 불경과 불상에 경의를 표하며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

2년 후인 374년에는 동진에서 아도(阿道)가 고구려로 들어와 본격적으로 부처의 교리를 민간에 설파하기 시작한다. 384년 집권한 고국양왕은 왕명(王命)으로 불교를 신성시하라고 했고, 불법을 어긴 자는 엄히 다스렸다고 한다. 드넓은 땅 위에 강력한 제국을 건설한 광개토대왕 역시 불교 숭상정책을 폈다.

그가 재임하던 392년에는 평양에서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9개의 절을 짓기도 했다. 고구려 불교의 주류는 대승불교(大乘佛敎)인 `삼론종`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 역시 침류왕이 왕좌에 있던 384년 불교를 받아들인다.

수만 리 먼 땅에서 경전을 전하러 온 인도 승려 마라난타를 침류왕은 귀빈으로 대접한다.

궁전에 처소를 마련해주는 것은 물론, 예의를 다해 이 외국 수행자를 높여줬다고 한다.

▲ 이차돈과 법흥왕이 생존했을 당시 신라의 예술적 감각을 보여주는 금동 장신구.
▲ 이차돈과 법흥왕이 생존했을 당시 신라의 예술적 감각을 보여주는 금동 장신구.

이런 이야기들로 미루어 볼 때 당시 백제에는 불교와 승려를 존중하는 문화가 이미 정착돼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의 불교는 성왕 때인 538년 일본으로 전해진다. “어렵지만 크나큰 복을 전해줄 교리가 불교에 담겼다”는 왕의 친서(親書)와 함께.

이처럼 고구려와 백제는 4세기경 일찌감치 불교를 받아들이고 그 교리를 왕권강화와 국민통합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반면 신라가 `공식적으로` 불교를 승인한 것은 이차돈이 순교한 527년(법흥왕 14년)으로 보는 관점이 일반적이다. 고구려보다 무려 155년이 늦은 것이다.

삼국 중 유독 신라의 불교 공인이 늦은 이유를 이봉춘 동국대 명예교수는 “지리적 고립성과 불교신앙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신라의 종교·문화적 특성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의 논문 `흥륜사와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서다.

여기에 보충해 “왜 신라는 불교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을까”라는 독자들의 궁금증에 답해준 사람은 경주학연구원 박임관 원장이다.

박 원장은 “불교는 중국을 통해 도입된 것으로 신라의 지정학정 위치상 고구려와 백제를 거쳐 수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 뒤 “토속신앙을 믿었기에 외래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귀족들의 반대도 신라로의 불교 유입이 늦어진 주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이런 까닭으로 큰 수난이나 박해 없이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 백제와 달리 신라는 미래가 기대되던 총명한 20대 젊은이의 안타까운 죽음이 있은 후에야 뒤늦게 불교를 공인하게 된 것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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