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대군 선비정신 재조명 나서는 영주시

영주시 순흥면 일대에는 조선왕조 6대 임금 단종의 복위운동을 펼치다 32살의 젊은 나이에 사사 당한 금성대군의 신단이 있다. 또, 유배를 당했던 위리안치지<사진>를 비롯해 금성대군의 충절과 의기를 숭상해 신앙적 표현으로 전해져 오는 두레골 성황제가 1900년경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단종복위 운동 실패에 따라 당시 순흥도호부의 백성들은 역모와 관련해 온갖 고초와 죽음을 맞이했지만,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충절과 의기를 보인 금성대군에 대한 존경심은 오히려 의기의 화신으로 신격화됐다.

영주시는 이런 지역 역사에 대한 재조명과 금성대군의 올곧은 충절을 바탕으로 한 역사문화콘텐츠의 구축을 통해 영주를 충절의 교육장으로 만들기 위한 사업을 추진 중이다.

□ 영주시 금성대군 신단 성역화 사업

영주시는 금성대군 신단 주변을 성역화해 충절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금성대군 신단 성역화 사업은 충절을 주제로 한 역사문화콘텐츠 구축으로 관광자원화는 물론 지역 역사를 재조명하는 교육장이 될 전망이다.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일대 2만8천120㎡에 2020년까지 103억여 원을 투자해 위리안치 가옥복원, 주변조경 및 탐방로 조성 등의 사업을 추진한다.

2012년 공유재산관리계획 승인에 따라 지난해까지 성역화 사업대상부지 37필지 중 22필지를 확보하고, 올해는 임시주차장 조성 및 종합정비 계획을 수립할 예정이다.

2020년 금성대군 신단 성역화 사업이 완료되면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소수서원과 연계한 유교문화벨트 조성과 충절의 교육장으로 활용, 청소년과 국민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시키고, 관광자원의 다양화로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 금성대군 신단 옆에 자리한 압각수.
▲ 금성대군 신단 옆에 자리한 압각수.

□ 지역민들과 금성대군의 관계

1457년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운동의 실패는 당시 순흥도호부(영주 지역)의 백성들에게 고통과 죽음을 경험해야 했던 지옥같은 시기였다. 현 영주시 안정면 동촌리 피끝마을 지명에서도 당시의 참상을 알 수 있다.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자 그로 인해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피가 십리를 흐르다 멈추었다해서 지명이 붙여진 곳이 바로 영주시 동촌면 피끝마을이다.

금성대군과 당시 영주 백성들과의 관계를 보면 지역을 몰살케 한 악연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지만,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금성대군은 지역민들에게 지역정신의 지주이자 화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단종복위 운동 당시 참담한 시기에도 지역민들은 금성대군을 원망하지 않고 충절을 높이 받들어 지역정신의 자존감으로 승화시켰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금성대군에 대한 지역민들의 신앙심의 표현과 같은 정월 대보름 두레골 성황제는 충절과 자존감을 바탕으로 금성대군을 신격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 금성대군의 신단.
▲ 금성대군의 신단.

□ 두레골 성황제

두레골 성황제는 충절과 절의의 상징인 금성대군을 신으로 모신다는 점이 특징이다. 두레골은 영주시 단산면 단곡3리 속칭 웃질막에 위치하고 있다. 두레골 성황제는 단종복위를 꾀하다 죽음을 맞은 금성대군의 혈석에서부터 시작된다.

조선 후기 순흥고을에 살던 권씨 부인의 꿈에 금성대군이 나타나 “내 피가 묻은 혈석이 죽동 냇물에 있으니 이를 찾아 거두어 달라” 부탁하면서 돌의 모양까지 일러주었다는 것. 다음날 마을 사람들은 죽동 냇가를 뒤져 금성대군이 말한 혈석을 발견해 가까운 죽동 서낭당에 안치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경에는 이 지역에 살던 이화라는 선비의 꿈에 금성대군이 다시 나타나 “이곳에 일본인들이 와서 침을 뱉고 욕을 하니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못 된다”면서 두레골로 옮겨달라 현몽해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됐다고 전해진다.

상민 자치기구인 순흥초군청은 충절과 의기를 보인 금성대군을 신격화하고 매년 정월 대보름에 성황제를 올리는데, 많은 성황제 중 제물로 소 한 마리를 통째로 바치는 곳은 두레골 성황제 뿐인 것으로 알려졌다.

성황제를 집전하는 제관의 집에는 금줄을 걸고 잡기의 근접을 차단하는가 하면, 옛날에는 성황제 준비 기간부터 여성의 순흥 방문을 금했다고 한다.

또, 정월 초팔일이 되면 제물로 바칠 소 한 마리를 선정하는데 이 소는 의인화해 양반이라 불렀으며, 소를 마련하는 비용은 마을 사람들이 성심을 다해 성금으로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관들은 정월 추위에도 두레골 인근 웃질막 목욕소에서 심신을 단정히 하고 제에 임했으며, 이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순흥 지역민들이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금성대군의 충절과 의기를 높이 받들고 신격화하는 것은 `선비의 고장`이란 지역적 특성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레골 성황제를 주도하는 순흥초군청은 산림자원을 중심으로 한 초군과 토호의 대립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당시 지역의 부호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김교림(1865~1938)에 의해 조직된 민간단체다.

 

▲ 두레골 성황제.
▲ 두레골 성황제.

□ 1200년 역사를 지켜본 압각수

금성대군 신단 옆에 자리잡은 압각수는 수령이 1200여 년이 된 은행나무로 지역의 역사를 지켜본 신목으로 인식되고 있다. 경상북도 보호수 제46호로 지정된 나무로 잎이 오리발과 닮았다 하여 압각수라 불리고 충신수라는 이름도 갖고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단종복위 운동의 실패로 수많은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지켜본 압각수는 순흥도호부가 혁파되자 나무가 잎을 피우지 못하고 병들어가다 혁파된 지 200여 년이 흐른 인조 21년(1643)에서야 생기가 돌고 껍질과 가지와 잎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런 현상이 있은 후 숙종 8년(1682)에는 나뭇가지가 무성히 자라고 잎이 만개하는 등 변화를 가져오다 다음해인 1683년에 순흥도호부가 혁파된지 226년만에 다시 복권되면서 압각수가 이를 예견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 성하성북 줄다리기
▲ 성하성북 줄다리기

◇ 금성대군은…

금성대군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여섯째 아들로 이름은 유(瑜)이며 시호는 정민이다. 세종 15년인 1433년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1436년에 성균관에 입학하며 1437년에 세종의 명을 받아 태조의 8남 의안대군의 봉사손으로 출계했다.

정치적으로 조카 단종을 지지했던 금성대군은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대한 반감으로 세조 1년 순흥에 위리안치 되고, 2년 후인 1457년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복위 운동을 꾀하다 실패해 32살에 사사된다. 이후 중 종조 때 3대에게 관작을 봉하고 승습의 명이 내려졌으며, 숙종 때에 와서 그의 관작이 복구되며 시호가 내려졌고, 정조 때에 이르러 종친으로 인정됐다.

/김세동기자kimsdyj@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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