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안 진
추억 밖의, 지워진, 잊혀진 무의미가, 그리움 밖의 사건 속 주인공이 되어 폭우와 폭풍과 땡볕의 여름 에너지를 충전 받아가며 나를 기다린 모양, 많이 탈색되어 있었다
내 그늘을 덧입으려고 페이지를 넘겼는데, 넘겨도 넘겨도 같은 페이지였다, 진땀을 흘리며 가까스로 찾아 첫줄부터 읽는 사이, 내 그림자는 벌써 떠나가버렸고, 그의 실루엣만 가뭇이 뒤따르고 있었다. 붙잡으려고 허우적거리는데 든 적도 없는 잠이 눈꺼풀을 비비며 하품하고 있었다
시인은 수면제를 복용하고 얼핏 잠이 들 뻔 했던 순간의 감각과 기억들을 펼쳐 보이고 있다. 그 흐릿한 기억의 통로에서 어설픈 실루엣을 만나게 되고, 온갖 고초와 시련을 견디며 자신을 기다린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허상(虛像)만이 아닌 것이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은 또 다른 자신의 그림자와 함께 우리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