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희룡<br /><br />서예가
▲ 강희룡 서예가

온 세상은 꽃 잔치로 봄을 말하지만 우리 국민의 마음 한 편이 아직 차가운 바다를 향해 있는 것은 3년 전 쓰라린 그날의 기억 때문이다.

2014년 4월 15일 인천을 출항해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다음날 아침 무렵 진도군 병풍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해 탑승객 476명 가운데 172명만이 생존했고, 304명이 사망 또는 실종한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특히 제주로 수학여행을 떠나던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324명이 탑승해 어린 학생들의 피해가 컸다.

국가는 존재하고 있었으나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줄 기구나 컨트롤 타워는 보이지 않았다. 행정자치부가 중심이 된 재난체계는 무용지물이었고 사고 발생 후 꾸려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는 각 기관이 보고하는 숫자를 모으는 엉터리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국가 통치자인 대통령은 오후 5시 15분쯤에야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으나 심각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듯 엉뚱한 질문으로 국민의 공분을 더 키웠다. 사건은 책임자 없이 입을 꾹 닫은 채 3년이 지났다. 더욱이 현재 세월호는 흉측한 몰골로 육지로 올라와 목포 신항에 거치되어 있으니 당시의 무기력과 찢어지는 슬픔, 분노가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드리우고 있다.

효종실록에는 조선 최악의 해상 사고에 대한 기록이 있다. `전남 우수사 이익달이 각 고을의 군함을 거느리고 바다로 나가 훈련을 하는데, 거센 비바람이 일어나 영암, 강진, 부안, 진도 등 고을의 군함이 모두 침몰했다. 사망한 수군이 1천여 명이었고 진도 군수 이태형도 물에 빠져 죽었다.`

이 해상사고는 전라도 앞바다에서 실시된 대규모 군사 훈련 도중 갑자기 풍랑이 몰아닥쳐 수많은 군함이 침몰하여 물에 빠져 목숨을 잃은 군사가 무려 1천 명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단일사고의 희생자로서는 최대 규모이다.

사고당시 함대를 통솔한 이익달은 1644년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몇 고을의 수령을 거친 후 1656년 전라 우수사에 임명됐다. 당시 사헌부에서는 별다른 이력도 없는 그의 우수사 임명을 부당하다며 체직을 요구했다. 하지만 `시험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효종의 뜻이 있었지만 부임한 지 반년도 못 되어 참사가 일어났으니 시험의 대가는 너무도 컸다. 이 사고는 전형적인 인재(人災)였다. 훈련 일자가 다가오자 이익달의 부하들은 날씨가 심상치 않다며 훈련을 연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으나 이익달은 듣지 않았다. 오히려 훈련 시작 하루 전에 모든 전함을 출항시켜 바다 위에서 대기하게 했다. 이튿날, 날이 밝기도 전에 풍랑이 몰아닥쳤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풍랑을 만난 군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다가 모두 수장되고 말았던 것이다.

358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을 두고 일어난 이 두 해상참사의 공통점은 사람 때문에 일어난 인재라는 점과 젊은 영혼들이 수장된 대형 참사라는 점이다. 다른 점은 조선의 해상훈련사고는 배가 전함이며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수군의 해상 훈련 중 일어난 공적행위 중 일어났으니 호국영령들이라는 것이다.

반면 세월호는 여행자나 일반 승객들을 목적지까지 해상을 통해 실어 나르는 과정에서 일어난 침몰사고이다. 침몰 당일 모든 언론들이 시시각각 보도하는 상황을 전 국민이 시청하였지만, 정작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할 대통령이 그에 대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기에 결국 `대통령의 7시간`은 진실을 밝혀야 할 정치 이슈화가 되었다. 세월호는 야당에 의해 정치판의 중심에 주저앉아 전대미문의 대통령탄핵에 일조를 하게 된다. 이로 볼 때 예나 지금이나 국가의 재앙은 유능한 지도자와 각 분야마다 전문적 지식을 갖춘 인재의 선택만이 해결할 수 있다. 능력사회가 아닌 인맥사회는 이미 국가의 기능이 상실됐다는 증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