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길수<bR>수필가
▲ 강길수 수필가
사월, 꽃 진 벚꽃꼭지가 핑크빛을 띠고 가로수 가지에 많이도 매달려 있다.

못 다한 청춘의 정열이라도 불태우려는가. 열매 못 맺는 벚꽃꼭지는 가지에서 얼마간 시위하다가 땅의 중력에 의탁하고 말 것이다. 수술이 사십 개 정도나 되는데도 수정을 못했는지, 땅에 떨어진 것이 작년엔 훨씬 많아 보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도시의 땅은 온전한 땅이 아니다. 어떤 것은 보도(步道)에, 어떤 것은 차도에 떨어질 뿐이니까. 바닥에 누운 꼭지는 오가는 이의 발이나 차바퀴에 밟히고 깔리며, 핑크빛 생을 마감하고 말 것이다.

처음 핑크빛 벚꽃꼭지를 밟던 때, 발바닥을 통해 전해오던 감각을 잊을 수가 없다. 명지바람이 도톰하게 뿌리고 간 벚꽃 눈을 밟을 때의 부드럽고도, 막막했던 느낌과는 사뭇 다른 무엇 말이다. 막 쌓이기 시작하는 싸락눈 밟을 때의 까칠함에다, 새봄 밝히는 전령사로 하늘가지에서 뽐내던 벚꽃의 화려함을 빼앗긴 애잔함. 세상과 영별하기 위해 보도에 내려앉은 허무함. 말 못할 사연들 간직한 채,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는 장렬함까지 느껴지는 발바닥 밑 벚꽃꼭지들의 절박한 소식….

시나브로 갈색으로 변해 삭아 바스러지며 빌딩머리에서 내려쏘는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또 다른 모습의 소식으로 나타나리라. 온 세상은 신록으로 짙어가고 녹음방초가 봄을 노래하고 춤추는데, 떨어진 벚꽃꼭지는 이렇게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것이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길바닥에서 나에게 말 못할 애잔함 안겨주던 벚꽃꼭지는, 지지리도 팔자가 나쁜가 보다. 쓸모없이 나뒹굴다가 사람 손길 안 닿는 구석진 곳에서 스러지거나, 쓰레기봉투에 담겨 거대한 쓰레기처리장에 묻히거나, 혹은 소각장에서 타버릴 운명이니.

가지에 남아 붙어있는 벚꽃꼭지는 씨방이 자라나 버찌가 된다. 어떤 나무는 많이 달리고, 어느 나무는 적게 달린다. 도시 가로수의 버찌는 동양계여서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단다. 그러니 다 익은 까만 버찌가 보도에 누워 나뒹굴어도 아무도 마음을 두지 않는다. 그저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

지난해 봄, 나는 일부러 까맣게 익은 버찌 몇 개를 따 맛을 본 적이 있다. 체리의 새콤한 맛을 기대했으나, 약간 떫고 무덤덤한 맛이 날 뿐이었다. 도회 가로수의 버찌도 지지리도 팔자가 나쁜 것인가. 사람의 먹을거리로는 애초에 글렀고, 보도블록과 아스팔트가 땅을 모조리 덮었으니 묻혀 새 벚나무로 태어나지도 못하며, 새의 먹이로 될 확률도 낮으니 말이다. 한줄기 명지바람이나 이따금 찾아오는 꿀벌에게 선택되어 운 좋게 수정된 버찌. 꿈 부푼 실한 열매로 커 익어도, 도회 가로수 버찌라는 이유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진 가련한 존재.

그랬다. 저 벚나무들은 사람의 손에 의해 모종밭에서 나고, 자라나 도시의 도롯가에 옮겨 심어진 것이다. 봄에 한 번씩 꽃 피우면 도시사람들을 즐겁게 할 뿐, 고목되어 꽃이 적어지면 가차 없이 베어내질 숙명이다. 만일 자연 속에 있었다면, 떨어진 벚꽃꼭지나 버찌도 모두 본래의 쓰임새대로 쓰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다른 나무들의 거름이 되거나, 흙에 묻혀 싹터 새 벚나무가 될 테니 말이다. 그러니 도시는, 자연을 거스리기 위해 인간이 지은 잔인한 괴물이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아이 소리가 사라져 가고, 심각한 고령화 등 발등의 불이 쌓여 있음은 모두가 아는 진실 곧, 팩트다. 젊은이가 줄어드니 미래는 어두울 뿐이다. 어둠을 밝혀야 할 책임이 큰 사람들은 물론, 많은 이들이 느닷없는 장미대선에 혼을 빼앗겨 심각한 어두움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잔인한 사월이다.

사람들이 도시 광장의 선동에 홀려버려, 혼미한 시간만 탕진하고 있는 또 하나의 잔인한 사월….

간밤 봄비에 떨어진 보도 위의 벚꽃꼭지를 아삭아삭 밟으며, 나도 이 잔인한 사월을 속절없이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