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라도 우리는 교육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기본부터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교육은 물론 사람을 기르는 일이며 사회에 덕이 되는 구성원으로 자라게 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간 사회의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나라의 필요 때문이었을까, 교육의 목표를 `경쟁에서 이기는 일`로 바꾸어 놓지 않았는가. 학교에 가는 일이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일이 되고 보니, 모든 것이 힘들 수 밖에 없다. 숙제가 힘들고 시험이 힘들며, 성적이 힘들고 석차가 힘들다.
배우는 일이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는 일이 되었으며, 서로 돌아보고 배려하는 협력은 사라졌다. 모든 과목에서 남들을 이겨야 할 뿐 아니라, 사회봉사도 음악예술도 아니 체육활동도 나를 단련해 가는 일이기 보다는 남들을 꺾고 이겨내는 일에만 골몰할 뿐이다. 학교에 가는 일이 고통이고, 선생님의 역할이 버거우며, 이를 바라보는 학부모들도 힘들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래서 남은 것은 처절한 입시 경쟁이고 본래 꿈꾸었던 `사람을 기르는 교육`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바뀌어 버린 교육의 목표를 가지고는 `즐거운 교육`을 구현할 방법이 없다. 진정으로 사람을 기르는 교육을 이루어 낼 길이 보이지 않는다. 교육심리학자 피아제(Jean Piaget)는 교육의 목표가 `지식의 양을 늘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사람을 기르는 데에 있다`고 하였다.
이제 우리는 훌륭한 인격체로서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에 마음을 쓰기로 하자. 남을 이겨내는 데 집중하기보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기르기로 하자. 내게 돌아올 이익에도 슬기로울 터이지만, 부족한 이웃들과 나누는 일에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을 기르기로 하자. 배우는 과목들에도 모자라지 않아야 하지만, 지·덕·체의 균형에도 치우침이 없는 사람을 기르기로 하자.
이렇게 덕스럽고 풍성한 교육이 벌어지려면, 학교는 즐거운 곳이어야 한다. 우선, 아침마다 학교로 향하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즐겁고 가벼워야 한다. 오늘 배울 일들과 오늘 만날 친구들을 한껏 기대하며 옮기는 발걸음이 즐거워야 한다. 이들 학생들을 교실에서 반겨 이 모든 배움과 나눔에 정성을 쏟을 선생님들이 즐거워야 한다. 또한, 이들을 곁에서 바라보며 응원하고 격려하는 학부모들의 기대어린 마음이 항상 즐거워야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는 `교육이야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힘센 도구`라고 하였다. 오늘 마뜩찮은 세상의 모습이 내일이면 그래도 바뀔 것이라는 기대는, 교육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교육 정책을 생각함에 있어 세세한 방법이나 지침도 물론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하염없이 바꾸어도, 교육을 생각하는 우리의 태도를 바꾸지 않고는 진정한 변화는 찾아오지 않는다. 교육은 경쟁을 익히는 과정이 아니라, 사람을 만들어 내는 꿈이 담긴 일이다.
다음 세대에 한없는 기대를 걸기로 하자. 교육이 펼쳐낼 내일에 한껏 높은 소망을 품기로 하자. 교육이 세상을 바꿀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