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희룡<br /><br />서예가
▲ 강희룡 서예가

조선의 당쟁은 선조 8년(1575) 동인과 서인의 분당으로 붕당정치가 처음 시작된 이래로 당파 간의 경쟁과 분열이 끊이지 않았다. 선조 후반 서인과 북인 간에는 치열한 정치적 대립이 있었다. 북인이 집권 세력이 된 후에는 북인 간에 다양한 분열이 일어났으며 특히 적장자 영창대군의 출생으로 인해 선조의 후계자 계승 구도가 복잡하게 전개되면서 북인의 분열은 가속화되었다.

조선시대 당쟁의 역사를 가장 객관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했다고 평가받고 있는 이건창(1852~1898)의 `당의통략`에는 당시의 당파 분열과 인물 간의 갈등 요인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대북은 이산해와 홍여순을 우두머리로 하는 자들이며, 남이공과 김신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자들은 소북이라 하였다. 소북이 왕의 견책을 받자 이산해와 홍여순이 서로 권력을 다투어 이산해 쪽은 `육북(肉北)`이 되었고, 홍여순 쪽은 `골북(骨北)`이 되었다. 이이첨의 상소로 홍여순을 탄핵하자 임금은 둘을 내쫓고 다시 서인을 참여시켰다. 얼마 되지 않아 체찰사인 이귀가 스스로 영남에서 돌아와 정인홍이 고향에 거주할 시의 불법적인 일을 논하자 정인홍은 `신은 성혼, 정철과 서로 화목하지 못하고 또한 유성룡과도 유쾌하지 못하여 지금 그 무리가 신을 미워함이 이와 같습니다.` 하며 상소하였다.(중략) 대사헌 황신이 성혼의 무고함을 상소하자 왕은 황신을 교체하고 조정에 있는 모든 서인을 내쫓고 간사한 성혼, 독한 정철이라는 교서를 내리고, 유영경을 이조판서로 하고 정인홍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이항복은 평생 당이 없었지만 이때 유영경이 이조판서가 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으므로 당에서 탄핵당하는 바가 되었고 정철의 심복으로 지적되어 정승직을 면하게 했다. 정인홍은 왕의 부름을 받자 먼저 최영경을 국문했을 때 대간으로 있었던 구성을 유배시켰다. 얼마 되지 않아 유영경이 정승이 되어 정치를 전임하자 정인홍의 무리를 많이 파면하고 교체했으며 오로지 소북만을 등용했다.

이 기록에는 북인 내의 소북과 대북, 육북과 골북의 분열상과 기축옥사, 성혼과 정철에 대한 탄핵 등을 빌미로 북인이 서인을 탄핵하고 권력을 잡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선조 후계자로 광해군을 지지하는 정인홍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유영경은 치열한 대립을 했다. 선조는 국난시기를 맞아 광해군의 세자 책봉에 망설임이 없었으나 후궁 출신의 아들이라는 점은 선조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55세라는 늦은 나이에 선조의 마음을 파고든 것은 어린 계비가 낳은 영창대군이었다. 적장자를 본 선조의 기쁨은 누구보다 컸기에 이러한 분위기는 조정에도 감지되어 선조의 환심을 사고자 영창대군의 세자 책봉을 은근히 청하는 세력들도 생겨났으니 예나 지금이나 정치판의 줄서기는 마찬가지였다.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북인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분립되었으며 대북의 중심에는 정인홍이, 소북의 중심에는 유영경이 자리를 잡았다. 정인홍측이 유배되자 소북에서 유영경을 지지했던 이들을 `유당`이라 부르고 붙지 아니한 이들을 `남당`이라 불렀다. 지금의 친박과 비박인 셈이다. 영창대군의 왕의 계승은 상당한 가능성을 보였으나 1608년 선조의 급서로 어린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는 것을 불안해한 선조는 유언에서 이미 왕세자로 책봉되었던 광해군을 국왕의 자리에 올릴 것을 명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그가 불안한 위치에 있을 때 정권의 실세였던 유영경을 탄핵했던 정인홍은 곧바로 석방되어 `왕의 남자`가 되어 정치와 사상계의 일선에 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21세기 오늘날 우리의 정당정치 역시 친박, 비박, 친문, 비문 등 분열된 패거리 정치에 빗대어 볼 때 선조 후반의 북인과 서인의 대립, 북인 내의 자체 분열이 과거의 옛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 것이 지금의 정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