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종호신부·구미 정평본당
사방이 온통 푸른빛입니다. 봄을 맞이하는 자연은 출발 준비를 마치고 100m 달리기를 시작하는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다들 앞다투어 잎을 내고 꽃을 피웁니다. 참 사랑스럽고 아름답습니다. 잎사귀 내지 말고 꽃 피우지 말라고 말려도 귀담아들을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모든 생명에 사랑의 마음이 가득합니다.

사랑이 가득하면 할 수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맛있는 요리를 하고 예쁘게 꾸미고 뭔가를 만들어 냅니다. 창조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맞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그 힘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위한 그 사랑으로 당신의 아드님을 파견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3,34) 복음에서 주님께서 새로운 계명을 남기시지요. 그런데 이 새로운 계명이 빵조각을 받은 유다가 떠난 직후에 주어졌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서로 사랑해야 할 사람의 범주 속에 심지어 당신을 배반한 유다도 들어 있지 않을까요?

유다의 배반으로 인해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십자가 시작의 순간에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게 과연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요? 십자가의 죽음이 영광이라니요? 목숨까지도 다 내어 줌이 영광이라니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필리 2,8 참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에 그 십자가는 영광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사람의 아들의 영광은 우리가 생각하는 영광과는 분명히 달라 보입니다. 무언가를 잔뜩 지니고 있는 영광이 아니라 다 내어줄 때의 영광입니다.

유다의 배반이 시작되는 순간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계명, `서로 사랑`함. 주님께서 제자들을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 그 계명을 주십니다. 어떠한 조건도 붙이지 않고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라는 초대입니다. 배반자조차도 사랑함, 그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영광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심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셨듯이.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영광은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신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기도를 바친다면 그것은 동시에 지금 있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대하겠다는 다짐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영광은 이 지구를 귀하게 여기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거처”(묵시 21,3)는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부활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얼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