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 위에서
필리핀 ②

▲ 새하얀 모래밭과 짙푸른 바다가 그럼처럼 펼쳐진 필리핀 해변.
▲ 새하얀 모래밭과 짙푸른 바다가 그럼처럼 펼쳐진 필리핀 해변.

2008년 봄. 엄마는 남편을 잃었다. 38년을 함께 살아온 사내의 간에서 시작된 암이 대장으로 번졌고 수술 등의 치료가 이미 늦은 상황. 담담하게 100여 일을 앓다가 비탄의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조용히 한 줌 재로 사라진 남편.

살아오는 내내 말수가 적었던 남편은 이렇다 할 유언 따위도 남기지 않았다. “집이 춥다. 따뜻한 곳으로 옮겨 살아라”란 말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게 더 슬퍼서였을까? 엄마는 소리 없이 오래 울었다.

기자 역시 아버지를 안타깝게 떠나보냈지만, 더 큰 아픔과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야 할 엄마를 곁에 두고 크게 울 수 없었다. 그저 이런 약속을 했을 뿐이다. “아버지 대신 내가 해외여행도 함께 가고 할 테니 너무 슬퍼마세요.”

크건 작건 약속은 지켜져야 하는 법. 필리핀은 기자가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찾은 두 번째 외국 여행지였다. 짙푸른 바다와 따뜻한 날씨를 좋아하는 엄마는 여행 몇 주 전부터 이미 들떠있었다. 보라카이 해변에서 입을 유행 지난 옷가지를 가방 속에 챙겨두고.

마침내 비행기가 필리핀을 향해 날개를 펼치던 날. 창가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아이처럼 티 없이 웃는 그녀를 보며 기자의 기분도 좋아졌다. `아버지도 함께였다면 더 좋았을 걸…`이란 생각에 기자도 엄마도 잠시 서글퍼졌지만, 어쩔 것인가. 죽은 사람과는 관계없이 살아있는 자들의 삶은 어떻게든 이어져온 게 인간의 역사이니.

필리핀 중서부 칼리보 국제공항(Kalibo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한 후 버스를 타고 2시간쯤을 달렸다. 이윽고 카티클란 선착장. 보라카이 섬으로 들어가는 조그만 배들이 줄지어 선 그곳에서 엄마는 놀란 얼굴이었다. 세상 어딘가에는 이처럼 보석처럼 푸르고 맑은 바다도 있다는 걸 모르고 살아왔단 사실이 새삼스러웠을 것이다.

 

▲ 누구나 `어린아이`였던 시절을 지나왔다. 만약 `엄마`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기자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 필리핀 해변에서 엄마의 손을 꼭 잡던 필리핀 꼬마.
▲ 누구나 `어린아이`였던 시절을 지나왔다. 만약 `엄마`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기자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 필리핀 해변에서 엄마의 손을 꼭 잡던 필리핀 꼬마.

▲ 슬픈 깨달음… `엄마도 새우를 좋아한다`

새벽밥을 먹고 부지런히 공항으로 가서 아침 비행기를 탄 덕분에 해가 지기 전에 보라카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숙소에 짐을 푼 우리는 해변으로 나갔다.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그곳에서 엄마는 환하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일상을 벗어났다는 해방감은 노인에게나 젊은이에게나 공평하게 다가왔다.

키가 훌쩍 큰 필리핀 청년 하나가 다가와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 해 지는 모습을 구경하시죠”라고 청해왔다. 그 정도 말은 영어를 하지 못해도 눈치만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 평소처럼 엄마는 걱정부터 했다. “배 타면 돈 많이 달라고 하는 거 아니냐?”

하지만, 막상 조그만 무동력 요트에 오른 엄마는 소녀처럼 신이 났다. 보라카이 섬 바람만을 이용해 꽤 빠른 속도로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요트 위에서 신발을 벗고 먼 곳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태평양의 석양 빛깔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배에서 내리니 허기가 몰려왔다. 보라카이의 일몰을 뒤로 하고 싱싱한 해산물이 펼쳐진 좌판에서 자신이 먹을 새우나 게, 생선을 직접 고르는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아기 주먹보다 더 큰 새우를 2kg 주문했는데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잠시 후 새콤달콤한 양념을 뿌려 요리한 새우와 필리핀 전통주 탄두아이, 망고주스까지가 식탁에 차려졌다.

 

▲ 여행지에서 엄마와 아들은 가끔 `친구`가 된다.
▲ 여행지에서 엄마와 아들은 가끔 `친구`가 된다.

기자는 그날 알았다. 엄마도 새우를 좋아한다는 걸. 사실 한국에서 큼직한 새우나 꽃게는 저렴한 식재료가 아니다. 기자가 어렸던 시절. 수산시장에서 새우나 꽃게를 사올 때면 엄마는 두 아들이 먹기에도 모자란 그걸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엄마가 새우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둘이 먹기엔 지나치게 많아 보이는 새우구이 앞에서 엄마는 음식 취향을 숨기지 않았다.

그처럼 많은 새우 껍질이 자신 앞에 쌓여있는 걸 그녀는 몇 번이나 보며 살아왔을까? 진원지가 불분명한 슬픔이 밀려왔고, 이상스레 술이 빨리 취했다. 그랬다. 아들이란 마흔 살이 넘어도 엄마 앞에서라면 철들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엄마`라는 존재가 품고 사는 내밀한 심경을 100% 이해할 수 없지 않을까.

필리핀 여행에서 돌아온 후 기자는 한국에서도 가끔 엄마와 함께 새우나 게를 요리하는 식당으로 간다. 연인에게는 자주 사줬던 그것들을 엄마에겐 40년 동안 대접해본 기억이 없다는 걸 반성하면서.

 

▲ 해변에서 만난 필리핀 소녀들. 선량한 웃음이 아직도 기억난다.
▲ 해변에서 만난 필리핀 소녀들. 선량한 웃음이 아직도 기억난다.

▲ 한적한 바닷가마을에서 만난 필리핀 모자(母子)

보라카이 섬에서 보낸 나흘. 일흔 살 엄마와 40대 중반 아들은 서로를 간섭하지 않으며 즐거워했다. 이름 그대로 눈이 내린 것처럼 새하얀 화이트 비치(White Beach). 사파이어빛 파도에 몸을 맡긴 엄마는 얼굴이 타는 줄도 모르고 온종일 수영을 했고, 멀찌감치서 그걸 지켜보며 기자는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의 책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마지막 날. 우리는 화이트 비치에서 트라이시클(오토바이를 개조한 필리핀 삼륜차)을 타고 보라카이 섬 한적한 마을을 둘러보러 갔다. 화려한 관광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나무로 허술하게 지은 집은 무너져가고, 그 앞에 나와 앉은 사람들의 얼굴은 한없이 어두웠다. 엄마는 또 한 번 놀라는 표정이었다.

젖먹이를 품에 안고 나타난 열아홉 살 `어린 필리핀 엄마`가 일흔 살 `늙은 한국 엄마` 앞에서 부끄러운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순간 눈시울이 붉어진 `늙은 한국 엄마`는 지갑을 열고 손에 잡히는 대로 지폐를 꺼내 `어린 필리핀 엄마`에게 건넸다. 그 늙은 엄마 역시 한국에서는 콩나물 값 500원을 깎으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날 엄마가 왜 그랬는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그저 가난한 필리핀 모자의 모습에서 자신과 아들의 젊은 날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

 

▲ 고요함과 원시적 아름다움을 간직한 필리핀의 바다.
▲ 고요함과 원시적 아름다움을 간직한 필리핀의 바다.

필리핀 해변에선 뭘 할까?

7천 개가 넘는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이니 필리핀은 눈길 닿는 곳곳이 해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부나 보라카이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섬은 1년 내내 휴양을 즐기려는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해변 주위에는 첨단시설을 갖춘 호텔과 바닷가재와 커다란 게를 요리해 판매하는 고급 레스토랑도 지천이다.

하지만, 필리핀에는 아직도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원시의 고요함과 아름다움을 지닌 해변도 적지 않다.

중부 비사야제도에 흩어져있는 섬들이 그렇고, 남부 민다나오 인근의 바다가 그렇다.

숨 가쁘게 달려왔던 일상의 속도에서 벗어나 조용한 해변에서 여유롭게 앞으로의 삶을 설계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분명 그 의미가 클 것이다.

 

▲ 여행자들이 자주 이용하는 필리핀 대중교통 `트라이시클`.
▲ 여행자들이 자주 이용하는 필리핀 대중교통 `트라이시클`.

◇ 선베드에 누워 평소 읽지 못했던 한 권의 책을…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나가게 되면 마음 편히 독서할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게 부정할 수 없는 한국의 현실이다.

맛있는 음식과 술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즐거운 휴가가 분명하지만, 인적 드문 조용한 바닷가에 드러누워 시인 김선우의 산문집이나 이청준의 소설 한 권을 펴드는 것 역시 멋진 휴양이 될 수 있다.

휴가 기간이 한국보다 훨씬 긴 유럽의 여행자들은 2~3주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필리핀 해변에서 보내기도 한다.

그들이 하루 종일 꼼짝도 하지 않고 선베드에 누워 두꺼운 추리소설이나 로맨스소설을 읽는 모습은 어떤 측면에선 부럽기도 하다.

진정한 휴가와 휴양은 마음은 비우고 머리는 채우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 필리핀 해변의 레스토랑. 사진 속 가족들처럼 기자와 엄마도 싱싱한 해산물 요리를 가운데 두고 오랜만에 속내를 털어놓는 시간을 가졌다.
▲ 필리핀 해변의 레스토랑. 사진 속 가족들처럼 기자와 엄마도 싱싱한 해산물 요리를 가운데 두고 오랜만에 속내를 털어놓는 시간을 가졌다.

◇ 요트 위에서 석양을 즐기는 소박한 호사를…

`요트`라고 하면 화려함이나 사치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물론 그런 생각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지중해나 서유럽 해변엔 한 척에 수백억 원이 넘는 호화스러운 요트가 수십 척씩 정박해있다. 하지만, 필리핀에서 만나는 요트는 소박하다. 그러면서도 멋스럽다. 4~5명의 승객을 태우고 돛을 펼쳐 붉게 물들어가는 바다를 30분에서 1시간쯤 항해하는 요트 위에서의 낭만을 한국 돈 1만원 안팎이면 즐길 수 있다. 조그만 요트를 가진 필리핀 청년들은 저물녘이면 해변으로 나와 관광객을 상대로 흥정을 벌인다.

“제 요트에 타세요. 당신에게 필리핀의 석양을 선물할게요.” 그 제의를 거부하지 말고 `작고 예쁜 요트`에 올라 잠시나마 태평양 저녁 바다의 낭만을 즐겨보자.

사진제공/구창웅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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