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글쓰기가 버겁다. 매주 칼럼을 쓰고, 매달 두세 군데 문예지에 시와 비평을 발표하고 있지만 신선도가 떨어진다. 글쓰기가 즐거울 땐 생각이 활어처럼 이리저리 뛰는데, 요즘은 좁은 수조에 갇혀 배 뒤집으려는 생선처럼 힘겹다. 글쓰기라는 게 참 모호한 행위다. 직업이라기엔 빈곤하고, 취미라기엔 삶의 너무 많은 부분이 저당 잡혀 있다.

일이 좋아서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마는 요즘 나는 정말 무기력하게 쓴다. 고장이 났지만 작동을 멈추지 않는 기계처럼.

실력 없이 요행으로 처신해온 밑천이 드러나고 있다. 복식호흡이나 두성을 배우지 않고도 노래 몇 곡 부를 수 있지만 더 부르면 성대 결절에 걸린다. 입력 없이 출력만 해서 고장 났다. 연료는 안 넣고 엔진만 돌리니 생각이 침체돼 눌러 붙었다. 요즘 책도 안 읽고 음악도 안 듣는다. 취미 활동도 일상 습관으로 편입돼 새로울 게 없다. 낯선 곳으로 여행 간 게 언제였던가. 삶에서 `최초의 경이`와 `미지에의 도전`을 잃었다.

글쓰기가 싫다. 싫으니까 힘에 부친다. 쓸 말이 없다. 세상사 무궁무진해 쓸 거리는 넘쳐나는데, 다들 그걸 쓰니까 말 보태기가 민망하다. 시의적 소재로 글을 몇 편 써봤지만 남들이 말한 바를 따라 읊는 게 고작이었다. 독창도 개성도 없는 글을 한 편 더 세상에 내놓는 것은 언어공해다. 말만큼 세상을 오염시키는 것도 없다.

말이 공해임을 절감하면서부터 글쓰기가 싫어졌다. 말은 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차단의 방식임을 자주 느낀다. 도처에 말이 넘친다. 범람하는 말들 중 마음에 담을 만한 것은 드물다. 생각의 전달, 타인과의 소통이 목적이 아니라 그저 말하는 게 좋아서 말하는 사람들, 말하기 위해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얼마 전, 사람들과 대화하는데, 말을 할수록 듣는 사람은 안중에 없고 오직 말하는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때 내가 한 말들은 세상에 떠도는 말들과 별다를 바 없는데다 주제를 이탈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말하는 자신에게 도취돼 계속 떠들었다. 어휘가 막막해 잠시 말을 멈췄다가 적당한 것이 튀어나오자 그 어려운 걸 해낸 자신이 대견하기까지 했다.

말하기와 글쓰기 모두 나르시시즘의 한 표출 형태다. SNS가 특히 그렇다. `아무 말 대잔치`다. 굳이 안 해도 될 말들을 한다. 글은 제대로 읽지도 않고 그 밑에다 글과는 무관한 댓글을 단다. 남들이 다 한 말 받아쓰기 한다. 아무 고민이나 의심 없이 풍문을 옮긴다. 입안이 가득 차 우물거리는 걸 못 참는다. 말과 글에 목적과 사유, 공감을 담기보다는 행위 자체에 만족한다. 그러면서 정치에 참여한다는 자부심, 소셜 네트워크 구성원이라는 안도감을 느낀다.

분명한 목적이니 귀담고 읽을 만한 가치니 하는 것들이 꼭 필요하지는 않다. 혼잣말도 욕설도 말장난도 다 말이고 글이다. 말과 글은 공기 같은 것이다.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가질 수 있다. 하지만 타인과 관계 맺기를 전제로 하는 언어행위라면 말과 글은 신중해야 한다. 내 말이 내 생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지, 그것이 듣는 이에게 또 어떻게 전달되는지, 상대방의 말을 나는 이해하고 있는지, 그의 말에 담긴 감정들을 공감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나르시시즘의 말하기도 문제지만 나는 없고 남의 말만 흉내 내는 앵무새 말하기도 곤란하다.

대선후보들의 말이 어디를 향하는지 유심히 살피는 요즘이다. 아무리 이미지 정치의 시대라지만 후보들의 말은 국민을 향하기보다 자신에게만 집중되는 듯하다. 자기 말이 없는 경우도 있다. 그들의 연설과 토론, SNS 활동은 모두 국민과 관계 맺는 언어행위다. 자신의 말이 국정철학을 잘 표현하는지, 국민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 자신이 국민의 요구를 이해하고 있는지, 국민들의 희로애락을 공감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정치도 `아무 말 대잔치`가 되는 걸 보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