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희룡<br /><br />서예가
▲ 강희룡 서예가

우리말에 `학을 뗀다`라는 말이 있다. 그 뜻은 어떤 일에 시달려 진이 빠지고 질리게 된 상황을 겪었을 때 하는 말이다. 여기서 학은 학질을 말하는데 한 번 걸리면 증상이 워낙 괴롭기도 하거니와 지독히 떨어지지 않는 몹쓸 병이기에 생긴 말이다. 이정귀(1564~1635)는 `월사선생집` 학질을 쫓아 보내는 글에서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친 뒤에 외적이 와서 치고,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해친 뒤에 사기가 와서 해친다`라고 적고 있다. 월사 이정귀가 이 병에 걸린 지 3년째가 되었으며, 나라도 7년간 이어진 왜란의 와중에서 온전할 리가 없어 이 지독한 학질을 앓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증상은 한여름에 두터운 겨울 갖옷을 입고도 화로를 끼고 살고, 추운 날 얼음물을 마시고도 갈증을 호소하며, 등에는 땀이 흐르고 다리는 떨린다 하였다.

잘 나가던 벼슬살이도 접은 터라 마침내 학귀(학질귀신)를 불러 전별의 잔을 건네며 사정하기에 이른다. `혼백이 달아나 마치 미치광이나 바보와 같고 마음이 두렵고 날로 기운이 쇠진하니 이게 다 그대 짓이라오.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토록 오래 머무른단 말이오. 부디 훌쩍 날아가 주시오` 그러자 학귀가 답하길 `고기가 썩으면 벌레가 생기듯이,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자기를 친 뒤에 외부의 적이 와서 치고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자신을 해친 뒤에 외부의 사기가 와서 해치는 법이오`하고, 그 이유를 조목조목 짚으니, 평소 음식과 거동을 함부로 한 것, 근심과 사념으로 기력을 해친 것, 명리의 굴레를 쓰고 벼슬에 연연한 것 등이 떠올랐다. 학귀가 또 말하길 `백성이 흩어지면 나라가 망하고 기운이 소진되면 몸이 죽는 법이오. 적이 나라 밖에 있는데 부강을 이루고자 부역과 세금을 가중하여 백성의 생산을 긁어모으면 민심이 이반하여 나라 안이 먼저 궤멸하게 되며, 병이 몸 바깥쪽에 있는데 속히 낫고 싶어서 독한 약을 투여하여 기혈을 마구 흔들어 놓으면 원기가 나른하여 절로 사멸하게 된다오` 학질 귀신은 나라와 개인의 병통을 하나로 보고 논하였던 것이다.

`맹자` `이루상(離婁上)`에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를 업신여긴 뒤에 남이 업신여기고, 집안은 반드시 스스로 망친 뒤에 남이 망치며,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공격한 뒤에 남이 공격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결국은 나라나 개인의 패망이 모두 스스로가 불러들인 것이라는 뜻이다. 자신이 자신을 중히 여기고 아끼지 않으면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몸은 병에 걸린다. 집안이나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스스로 홀대해 지키고 보존하는 데에 우선 힘쓰지 않는다면 갖가지 재난은 물론 외적의 침입까지 받게 된다는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우리는 이날 일본에 국권을 빼앗겼다. 그리고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은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였고, 33인의 한 사람으로 그 자리에 참석한 한용운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변절해 시대의 아픔에 눈감았을 때에 만해는 끝까지 절의를 지키며 활동했지만 끝내 조국의 해방은 보지 못한 채 해방 한 해 전 1944년 생을 마감한다.

지금 우리사회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대선주자들이 난립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을 보이는 인사들이 빚어낸 결과로 대권보다는 당권에 눈먼 정치쇼가 국민들을 농락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를 위기의 수렁에서 건져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존재감을 부각시켜 개인의 영욕을 채우려는 인사들이다. 학질은 이미 사라진 병이지만 자중자애하라는 옛 선비의 경계는 오늘날 더욱 간곡하게 다가온다. 빼앗긴 조국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승려로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택했던 만해의 애국관은 환희의 역사에 가려 정작 되새겨야 할 아픔의 기억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국민들은 지금의 가식적인 위정자들을 냉철한 판단으로 반드시 솎아내서 국치일 8월 29일을 또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