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 위에서
불가리아 ③

▲ 종교적 향기가 물씬 풍기는 불가리아의 조형물.

나이에 관계없이 낯을 심하게 가리는 사람들이 있다. 성격 탓이다. 그런 경우 여행자로서는 낙제점이다. 다행이랄까?

기자는 처음 보는 사람과도 어렵지 않게 어울리는 인간형이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불가리아 소피아에서도 적지 않은 낯선 이들과 터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가격에 비해 시설이 나쁘지 않은 숙소 호스텔모스텔에서 아침과 저녁까지 제공받으며 비교적 잘 지냈다. 익숙하지 않은 치즈와 홍차, 빵과 소시지, 소금에 절인 올리브로 아침을 먹는 것도 곧 익숙해졌다.

저녁으로 나오는 스파게티도 한국에선 즐기지 않는 음식이었지만 뭐 어떤가.

미국과 영국, 크로아티아와 폴란드에서 온 젊은 친구들이랑 잡담을 주고받으며 달게 먹었다. 일본 친구와 먹은 중국식당의 볶음밥과 양념 돼지고기 구이도 좋았다.

 

▲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시내. 근사하게 조각된 동상이 보인다.
▲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시내. 근사하게 조각된 동상이 보인다.

▲ 8개월째 여행 중이라는 한국인 여행자와의 만남

그 숙소에서 지낸 마지막 날. 한국을 떠나 중국과 중동을 거쳐 유럽까지 8개월째 여행 중이라는 20대 중반의 사내와 만났다.

그때는 기자의 배낭여행도 6개월을 지나고 있었기에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서 오랜만에 만난 같은 나라 사람이 그리웠을 시기다.

스물여덟이라고 했던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에게 선배로서 밥이라도 한 끼 사주고 싶었다.

“세상엔 저 외에도 긴 여행을 하는 사람이 많군요. 아무래도 형편은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했던 내가 나을 테니 저녁을 살게요. 뭐 먹고 싶어요?”

돌아온 대답이 재밌었다.

“아… 네. 여기도 KFC가 있던데, 그걸 보니 학교 친구들과 먹던 닭튀김에 시원한 맥주가 먹고 싶었어요.”

모처럼의 식사 제의에 겨우 통닭이라니…. 그의 소박함이 마음에 들었다.

 

▲ 소피아 공원에서 만난 화려한 색채의 그림들.
▲ 소피아 공원에서 만난 화려한 색채의 그림들.

한국의 수도 서울과 달리 시끄러움과는 거리가 먼 도시 소피아.

우리 둘은 수령(樹齡)이 족히 수백 년은 넘어 보이는 가로수들을 뒤로 하고 불가리아 KFC를 찾아나섰다.

한국어를 하며, 한국인과 걸어 다녔으니 그곳이 외국인지 내 나라인지 헷갈렸다.

어제 내린 비 탓에 부쩍 떨어진 기온. 한국의 초봄 날씨를 보이는 거리를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고 프라이드치킨과 콜라, 감자튀김 등을 잔뜩 주문했다.

이제는 오래 알아온 동생 같아진 스물여덟 후배가 말했다.

“여행은 고칠 수 없는 병(病)인 것 같아요. 저도 15년 후쯤엔 선배님처럼 또 다른 도시를 떠돌고 있겠지요?”

마치 시인 같은 그의 어법에 기자의 답변도 장황해졌다.

그날, 우리 둘은 자정까지 숙소인 호스텔모스텔로 돌아가지 않았다.

왜냐고? 술은 그런 날 마시라고 있는 것 아닌가.

▲ 소피아의 거리 풍경.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 소피아의 거리 풍경.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 벨기에 걸스카우트 6인방, 요즘 앤트워프는 어때요?

“여행이란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에 다름없다”는 말을 믿는다.

이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믿음이다. 만약 기자가 다시 길고 먼 여행을 떠난다면 그건 새로운 땅과 새로운 바다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일 것이다.

소피아에서 만난 `스물여덟 사내` 외에 떠오르는 이들이 또 있다.
 

불가리아를 떠나 도착한 다음 여행지는 마케도니아. 거기엔 막 청소를 끝낸 유리창처럼 맑고 깨끗한 호수가 아름답게 펼쳐진 오흐리드라는 그림 같은 마을이 존재한다. 그곳에 머물 때다.

벨기에 앤트워프에 산다는 발랄한 여고 졸업반 소녀 여섯 명을 만났다. 한 달 후면 대학생이 될 열여덟 살 아이들.

스카우트 대원인 그 애들은 대학에 다니는 선배 둘의 인솔 아래 이른바 `어드벤처 캠핑(모험여행)`을 왔고, 기자가 묵었던 숙소 근처에 텐트를 치고 있었다. 친절하고, 싹싹하며 나이답게 순수한 소녀들과의 더듬거리는 영어 대화가 더없이 즐거웠다. 벨기에는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쓰는 나라다.

그럼에도 모두가 영어도 잘했다. 기자와 같은 숙소에 있던 열여덟 네덜란드 소년 루벤 역시 신이 난 눈치다.

왜 안 그렇겠나? 열여덟 소녀를 싫어하는 열여덟 소년은 지구 위에 없다.

형이 한국 유학생과 친한 탓에 `소녀시대`의 뮤직비디오를 봤다는 루벤에게 슬쩍 물었다.

“걸스 제네레이션(소녀시대)과 쟤들 중에 누가 더 예뻐?”

어색하게 웃으며 우물쭈물 말끝을 흐리는 루벤. 맞다. 열여덟은 그런 나이다. 부끄러우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 노면전차가 한가롭게 오가는 불가리아의 한낮 풍경.
▲ 노면전차가 한가롭게 오가는 불가리아의 한낮 풍경.

▲ 그리운 사람들, 그리운 시간들…

인상적이었던 건 그 벨기에 소녀들 중 매우 뚱뚱한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전혀 기죽어 보이지 않았고, 누구도 그 아이를 따돌리는 기색이 없다는 거였다.

`왕따`라는 단어가 신문 사회면 기사에 자주 등장하는 한국의 상황이 동시에 떠올랐다. 너나들이로 어울리고, 평등하게 마음을 나누는 듯한 그 아이들을 보며 벨기에 교육의 어떤 면이 `왕따`를 막아내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소녀들은 낮에는 산에 오르거나 배를 빌려 섬으로 소풍을 갔고, 해가 질 때면 돌아와 텐트촌에서 콜라나 우유를 마시며 서툰 솜씨로 요리를 했다. 누구랄 것도 없었다. 모두가 너무 귀여웠다.

2유로(약 2천500원)짜리 선글라스를 호수에 빠뜨렸다고, 하루 종일 물가에서 놀았더니 피부가 햇볕에 타서 벗겨졌다고 칭얼대던 그 소녀들도 이젠 어엿한 대학생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금빛 머리칼이 곱던 벨기에 쌍둥이 자매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다.

`왕따`라는 단어 자체를 모르고 자랐으니, 교사가 돼서도 그렇게 가르치겠지.

푸른 보석 사파이어보다 환하게 웃던 여섯 명의 벨기에 스카우트 소녀들. 앞길이 구만 리 같은 그 친구들의 청춘에 축복의 말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쳇바퀴의 일상 속에서만 살았다면 결코 만날 수 없었을 사람들.

다소 지루했던 불가리아 소피아에서의 여정을 즐겁게 바꿔줬던 스물여덟 한국 청년과 오흐리드에서 만난 벨기에 앤트워프 꼬마숙녀 6인방.

그때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아저씨는 너희들의 행복과 건강을 빌어줄 것이다. 진심을 다해.

▲ 소피아에선 여러 종교의 교당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 소피아에선 여러 종교의 교당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소피아를 제대로 즐기는 2가지 방법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 도착해 찾아간 숙소.

가장 먼저 들은 말이 “좀도둑에 주의하고, 가방과 지갑을 조심해라”는 것이었다.

불과 며칠 전에도 프랑스에서 온 여성 여행자 한 명이 시장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는 정보와 함께였다.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까?” 사람살이의 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재래시장은 도시의 어떤 곳보다 매력적인 장소다. 해서, 그곳을 피해갈 수 없었기에 용감하게(?) 길을 나섰다.

다행히 운 좋게도 기자는 좀도둑과 소매치기를 만나지 않았다.

넉넉한 인심을 지닌 불가리아 사람들의 따스한 미소로 기억되는 공간 소피아의 재래시장. 이와 함께 거리를 걷다가 만나는 여러 종교의 교당(敎堂)도 기억에 남는다. 이전 여행기에서 언급했듯 소피아엔 이슬람교도, 불가리아정교도, 가톨릭교도, 기독교도들이 함께 어울려 생활하고 있다.

◇ 달콤한 과일과 싱싱한 채소가 한국의 반값

소피아의 재래시장은 화려한 색채로 관광객을 유혹한다. 체리와 사과, 살구와 수박 등의 과일이 붉고 푸른 저마다의 빛깔로 달콤한 향기를 뿜어낸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새콤한 체리가 아기 주먹 크기다. 부드러운 식감의 살구 맛도 잊을 수 없다.

토마토와 가지, 각종 녹색 채소 역시 새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천막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재래시장의 인심은 한국이나 불가리아나 크게 다를 바 없어서 “깎아주세요”라는 요구도 얼마든지 해볼 수 있다. 인심 좋은 상인은 덤에도 인색하지 않다.

게다가 가격도 한국의 절반 정도로 저렴하니, 소피아를 찾는 여행자들은 꼭 재래시장에 들러보길 권한다. 물론, 좀도둑을 조심하면서.

◇ “저건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교당일까?”

소피아엔 역사적·종교적으로 의미가 큰 건축물이 적지 않다. 알렉산더 네프스키 성당, 성 니콜라스 정교회, 성 게오르기 교회 등. 이처럼 세계적으로 알려진 교당만이 아니다. 도시 곳곳에 자리한 조그맣고 낡은 가톨릭교회, 이슬람성당, 불가리아정교회당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종교인이라면 더 좋겠지만, 종교를 가지지 않은 여행자도 풍경을 즐기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예쁘게 꾸며진 정원에 들어선 작은 교당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어 보는 것은 유의미한 체험이다. 주말엔 교당에서 젊고 아름다운 불가리아 신랑과 신부의 결혼식도 열린다. 만약 용기가 있다면 초대받지 않은 이방(異邦)의 축하객이 돼보는 것도 즐거울 것이다.

사진제공/류태규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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