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형<br /><br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겨우내 기꺼이 산짐승들의 식량처가 되어준 산수유나무가 노란 봄을 가지마다 풍성하게 달았다. 그 밑으로 3월 찬 서리로 세안을 마친 제비꽃이 얼굴을 내밀었다. 철모르는 인간 사회에 침묵으로 시위하던 목련과 매화가 경쟁하듯 가슴을 열고 봄바람이 쉬어갈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조금 늦고 빠를 뿐 어수선한 세상과는 다르게 올해도 자연은 질서정연하게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3월이다.

그럼 학교의 3월 모습은 어떨까. 학생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다고 쓰고 싶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개학하고부터 산자연중학교에는 전학을 상담하기 위한 전화가 끊이지 않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무턱대고 학생을 데리고 학교로 찾아온다. 아픈 말이지만 산자연중학교의 전화벨이 시끄럽다는 것은 그만큼 공교육이 잘 안 돌아간다는 것이다.

“선생님,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요. 해달라는 거 다 해주는데, 왜 학교를 안 가겠다고 하는 건지? 나가서 놀지도 않고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라고 그렇게 이야기해도 데려오지도 않고 혼자 하루 종일 뭐하는지. 저희 부부는 아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해주는데 도대체 애가 왜 저럴까요?” 산자연중학교를 찾은 어느 학부모의 말을 잠시 인용하였다. 정말 뭔가 한이 맺힌 사람처럼 쏟아내는 말에 필자의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비록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지만, 이런 상황을 만날 때마다 필자는 긴장한다. 그 긴장감은 필자에게 습관을 만들어 주었다. 필자는 학부모가 말을 쏟아내기 시작하면 귀는 학부모에게 가 있지만 눈은 언제나 학생을 향한다. 그리고 학생을 관찰한다. 그 관찰에는 언제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학생들의 표정이다. 학생들의 표정은 딱 두 가지다. 무관심과 독기. 학부모들은 학생의 반응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할 말만 한다. 그 말이 계속 될수록 학생들은 자기 세계로 더 깊이 빠져든다.

그러면 필자는 불쑥 묻는다. “부모님께서 해주신 것들이 분명 학생이 원해서 해 주신 거 맞지요.” 이 말의 효과는 매우 크다. 가장 큰 효과는 학부모들이 말을 멈춘다는 것이다. 이 말이 나오기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쉼 없이 이야기하던 학부모들도 이 말이 나오는 순간 얼음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뭔가 선고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필자를 바라본다. 그러면 필자는 학생들에게 묻는다. “네가 부모님께 해달라고 부탁했니?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니?” 아이들의 대답은 단호하다. “아니요!”

한때 부모와 학부모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공익 광고가 전 국민을 감동시킨 적이 있다. 그 때 나온 공익 광고 문구를 잠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부모는 멀리 보라하고, 학부모는 앞만 보라고 합니다. 부모는 함께 가라고 하고, 학부모는 앞서 가라합니다. 부모는 꿈을 꾸라하고, 학부모는 꿈꿀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당신은 부모입니까, 학부모입니까. 부모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길 참된 교육의 시작입니다.”

3월! 학생들은 모두들 큰 꿈을 가지고 교정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런데 그 꿈은 과연 누구의 꿈일까? 그리고 그 꿈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교과서적으로 보면 당연히 꿈의 주인공은 학생이어야 하고, 학생들은 봄 향기 가득한 교정에서 자신의 꿈을 행복하게 가꾸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모두들 알다시피 지금의 교육 현장에서는 너무도 먼 나라 이야기이다.

`새 학기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안을 느끼는 일종의 적응 장애`를 뜻한다. 누구나 새로운 것에 대한 불안은 가지고 있다. 여키스-도슨의 법칙처럼 때로는 적당한 불안은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불안이 지속되면 그것은 병이 된다. 새 학기, 우리 학생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분명 점검해봐야 한다. 그 시작은 교사부터 모두가 `나는 부모인지, 아니면 학부모인지`를 따져 묻는 일이다. 우리 아이들의 마음에도 하루빨리 환한 봄꽃이 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