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대 호

한잔 술에 여기까지 왔구나

휘청거리며 걷다 보니

해는 지고 어둠이 깔리는 강가

강물은 어둠으로 깊어간다

강바닥에 쌓이는 흙 앙금도

돌에 묻은 푸른 이끼도

물로 감춘 물풀들도

강둑에는 하얀 꽃, 노란 꽃, 빨간 꽃

푸른 잎

모든 것들은 그 윤곽만 남고

어둠으로 묻힌다

이제까지 살아온

내 마음속 입혀온

하얀 꽃, 노란 꽃, 빨간 꽃

항시 푸를 것으로만 보았던 무성한 숲들도

새벽의 먼동으로 왔으니

해 다 진 어둠 속에서는

이제 떠나보내야 한다

흐릿하게 검은 흔적만 남기고

한 생을 치열하게 살아온 시인이 저문 강가에서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깊은 사념에 빠져듦을 볼 수 있다. 불꽃처럼 화려했던 순간들도 있었고 시리고 아픈 어둠의 시간들도 있었다. 이제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시인에게는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생의 과정으로 여기고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본다. `새벽 먼동으로 왔으니 어둠 속으로 떠나보내야 한다`라는 고백에서 겸허한 시인의 생의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