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책 읽기는 연애와 같다. 400쪽 책 한 권을 남녀의 만남에 빗대어 보면 책 읽기와 연애의 상관관계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처음 만난 남녀가 우선 서로의 외모에 주목하듯 처음 30쪽을 읽는 독자는 작가의 문체나 이야기의 도입부가 입맛에 맞는지를 재어본다.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아 금방 책을 덮어버리는 깐깐한 독자들도 있다. 100쪽까지의 읽기는 서로의 마음을 엿보려 다가가는 과정이다. 첫인상에 이끌린 남녀는 지속적으로 만나며 상대의 마음을 들춰본다. 모든 것이 흥미진진하다. 조금씩 나타나는 작가의 생각, 사건의 전초와 인물 간의 갈등이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을 성급하게 한다. 본격적인 교제에 앞선 전 단계로 남녀의 만남에서 싱그러운 에너지가 가장 충만한 시기다.

잊히지 않는 100쪽 중 하나가 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의 1부 `시편`이다. 그걸 읽을 때 내 방이 남태평양 산호초 군락처럼 느껴지고, 창밖의 빗소리조차 영롱한 벨플레이트 연주로 들렸다. 사랑에 빠지는 사이 우리는 이러한 착시와 환청을 경험한다.

300쪽까지의 읽기는 열애의 날들이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남녀는 거칠 것이 없다. 정신적, 육체적 교감이 완성된다. 항상 붙어 다니고, 자꾸 보고 싶다. 책을 손에서 놓질 않고, 옆구리에 끼고 다닌다. 밥 먹으면서 읽고, 화장실 가서도 읽는다. 이때쯤 작가의 저술 의도가 명확히 나타나고, 갈등구조와 사건의 본말이 수면 위로 떠올라 흥미의 절정을 이룬다.

마지막 400쪽까지의 읽기는 이별 연습이다. 만남은 흥미를 잃고, 대화는 차분해진다. 설렘이 사라진 대신 신중함이 생긴다.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함께 걸어갈 방향을 모색한다. 결말로 향하는 책장은 쉽게 넘겨지지 않는다. 얇아지는 남은 책장의 두께가 안타까워 읽었던 부분을 다시 읽는다. 작가의 사상이 날개를 접으며, 갈등이 해소되고 사건이 종료된다. 주인공이 죽는 일은 다반사고, 시공의 배경이 허무하게 사라지기도 한다. 마르케스 `백 년 동안의 고독`처럼 말이다.

책을 덮는 순간, 독자는 연인과의 헤어짐처럼 책과 이별한다. 그러나 여운이 남아 헤어진 남녀가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듯 다른 책들을 읽기도 하고, 헤어지고도 이내 못 잊어 덮었던 책을 다시금 펼치기도 한다. 그러다가 어느 책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돼서 `결혼`을 해버리기도 한다.

책 읽기에는 남녀 관계와는 달리 사회 통념의 도덕이 존재하지 않는다. `장미의 이름`을 본처 삼고, `슬픈 열대` `건축 예찬` `부서진 사월` `김수영 전집`을 후처 삼을 수 있는 일부다처, 일처다부의 세계다. 폴 오스터와 연애하면서 후지와라 신야와 바람을 피울 수 있고, 사르트르와 카뮈를 동시에 사귀며 `문어발`을 걸칠 수도 있다. 모든 책에는 고유의 빛깔과 향기가 있으며 그것은 여러 이성의 다양한 매력과도 같다.

`모래의 여자`를 읽을 때 나는 비밀스러운 연애를 했고, 이스마일 카다레의 책을 읽을 때엔 회색빛 우울을 지닌 여인과 사랑을 나눴다. 정민 교수의 책을 읽으면 전통 있는 가문의 규수를 만나고, 칼 세이건을 읽으면 쾌활한 천문학도 여대생을 만난다. 마티스나 샤갈에 관한 책을 읽고 있으면 큐레이터와 마주 앉아 지치지 않는 대화를 나눈다. 이처럼 책 읽기는 새로운 세상으로의 여행이며 다양한 가치들의 경험이다.

두 인격체의 만남이 서로의 가치관에 변화를 일으켜 내면을 성숙시키듯 책 읽기 역시 작가의 생각과 다양한 삶의 기록들이 독자의 정신을 확장시킨다. 이성과의 연애 경험이 책 읽기에 미치는 영향은 없지만 책 읽기가 이성교제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책과의 연애 경험이 많을수록 이성과의 교제는 더 현명하고 풍요로워진다. 책과의 연애는 황홀한 로맨스다. 나는 오늘도 사랑하는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나의 궁전, 갖가지 매력의 연인들이 내 이름을 부르는, 책으로 지은 세상으로 향한다. 그들과 브루클린의 밤거리를 지나 이베리아, 차마고도로 이어지는 데이트 코스를 사뿐사뿐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