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 위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②

▲ 사라예보에선 아직도 `내전` 당시에 파괴된 건물을 볼 수 있다.
▲ 사라예보에선 아직도 `내전` 당시에 파괴된 건물을 볼 수 있다.

사람살이의 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재래시장은 기자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다.

그간 여행한 나라마다 시장은 빼놓지 않고 들렀다. 하지만, 박물관이나 유적 등에 관한 흥미는 크지 않다. 사람마다 여행스타일이 다르니까 그렇다.

사라예보에서도 굳이 박물관을 찾아갈 생각은 없었다. 라틴 다리 인근 노천카페에 앉아 높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시원한 보스니아 맥주를 마시며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게 더 좋았다.

그런 여유를 즐기는 가운데 멀리 산마다 새하얗게 들어찬 것들이 눈에 띄었다. 저게 뭐지? 궁금증이 일었다. 사라예보는 야트막한 산으로 빙 둘러쳐진 지형이다. 그 산마다 하얀 기둥 혹은, 막대기 같은 게 지천이다. 뭘까? 궁금증은 즉각 해소해야 한다. 게다가, 게으른 여행자에게 남는 것은 시간뿐이니 가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슬리퍼를 끌며 천천히 산에 올랐다. 비구상 같던 풍경은 금세 실체가 돼 눈앞에 펼쳐졌다. 하얀색 비석이었다. 한두 개도 아니고, 일이십 개도 아니고, 일이백 개도 아니다. 수천수만 개였다.

 

▲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오가는 대중교통 수단 노면전차.
▲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오가는 대중교통 수단 노면전차.

비석, 무덤, 떼죽음, 학살(Genocide), 비극, 인종, 종교…. 하나도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단어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으로 휙휙 지나갔다. 그때가 한여름이었음에도 한기가 몸을 엄습해왔다.

어디서 온 것인지 탁한 침을 흘리는 개 몇 마리가 기자의 주위에서 으르렁거렸다. 눈알이 시뻘겋게 충혈돼 있었다. 위협적이었다.

▲ 파란 하늘과 하얀 비석… 죽은 자들의 공간

그 순간, 전후 맥락도 없이 왜 원로시인 고은(84)의 `문의마을에 가서`라는 시가 떠올랐는지 아직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는가…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 지금은 평화롭게 보이는 사라예보의 시내 풍경.
▲ 지금은 평화롭게 보이는 사라예보의 시내 풍경.

갑작스러운 두통이 밀려왔다.

아시아의 참혹한 학살 현장인 캄보디아 `킬링 필드`(Killing Fields)를 본 후 겪었던 것과 유사한 공황상태에 빠졌다.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를 혼잣말로 반복해 읊조리며 망연자실 서 있는 기자 앞으로 보스니아 아이들이 다가와 개를 쫓아줬다.

 

▲ `보스니아 내전` 때 학살당한 사람들의 묘지. 푸른 하늘 아래 새하얀 비석들이 보인다.
▲ `보스니아 내전` 때 학살당한 사람들의 묘지. 푸른 하늘 아래 새하얀 비석들이 보인다.

▲ 때론 환멸을 부르는 인간들의 악행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거나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단어를 치고 엔터키만 누르면 줄줄이 나열되는 정보를 혼자 아는 척 길게 인용할 필요는 없다. 해서 기자가 알고 있는 동서양 현대사의 `비극적 죽음`에 관해 짤막하게 요약하려 한다.

먼저 1980년 광주항쟁. 18년을 장기집권 하던 독재자가 전혀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았다.

최측근으로 불리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비명에 간 것이다. 이어진 12·12 쿠데타. 전두환과 노태우, 박준병과 정호용 등 권력을 잡은 육군사관학교 동기들. `신군부`로 불리던 이들에겐 휘어잡은 헤게모니를 공고히 해줄 희생양이 필요했다.

광주가 피를 흘렸다. 수백 명이 죽었고 수천 명이 다쳤다. 제 나라 군인이 쏜 총탄에 자국민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5·18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그로부터 37년의 세월.

아직도 5월이 되면 광주엔 고통을 호소하며 정신병원을 찾는 환자가 다른 달보다 많다고 한다.

 

▲ 슬픔과 학살의 역사와는 관계 없이 선량하게 자라는 보스니아의 아이들.
▲ 슬픔과 학살의 역사와는 관계 없이 선량하게 자라는 보스니아의 아이들.

다음은 1976년 크메르루즈(Khmer Rouge)의 캄보디아 대학살.

1975년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에 경도된 프랑스 유학생 출신 게릴라들이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을 장악한다. 농촌을 중심으로 하는 원시적 공산체제를 꿈꾸었던 이들은 무지막지한 개혁을 단행한다. 아니, 개혁을 빙자한 학살을 자행한다. 크메르루즈는 지식인과 유산계급의 씨를 말리려 했다.

손에 굳은살이 박이지 않았다고, 글을 읽을 줄 안다고, 안경을 썼다고 처형장으로 끌고 갔다.

심지어 공무원과 교사의 어린 자식들까지 마구잡이로 죽였다.

폴 포트, 카잉 구엑 에바브 등이 주도한 학살이었다. 4년간의 크메르루즈 집권기간 동안 캄보디아 인구 800만 명 중 150만 명이 살해됐다.

그리고, 보스니아 내전. 1990년대 초반 소련연방 붕괴 후 동유럽 전역은 독립과 자치를 요구하는 서로 다른 민족들의 목소리로 뜨거웠다.

 

▲ 사진 속 사라예보의 이슬람교도 소녀들. `보스니아 내전` 당시엔 많은 수의 미성년자들도 안타깝게 죽었다.
▲ 사진 속 사라예보의 이슬람교도 소녀들. `보스니아 내전` 당시엔 많은 수의 미성년자들도 안타깝게 죽었다.

유고슬라비아연방에 속해 있던 보스니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민투표를 통해 연방에서 탈퇴한 1992년. 보스니아 국민의 30% 이상을 차지하던 세르비아계는 그들과 종교가 다른 무슬림이 나라의 패권을 쥐는 걸 저지하려 했다. 유고연방의 주도국이었던 세르비아의 지원 하에 학살자들이 보스니아로 속속 들어왔다. 당시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의 최고 정치지도자와 군사령관이 합세해 수도 사라예보를 포함한 보스니아 전역에서 `인간 도살`을 시작했다.

차마 입에 올리기 힘든 일이 수년간 일상처럼 벌어졌다. 20만 명 이상이 죽고, 250만 명에 이르는 난민이 발생했다. 여섯 살 여자아이와 여든이 넘은 할아버지까지 이마에 조준사격을 해 죽였다.

수천·수만의 무슬림들이 학대와 강간을 당했고, 비인간적인 환경 속에 격리됐다. 부정할 수 없는 `야만의 시간`. 이전 여행기에서 언급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라도반 카라지치, 라트코 믈라디치 등이 주도면밀하게 진행한 학살이었다.

 

▲ 이슬람 스타일로 만들어진 사라예보 무슬림식당의 요리들.
▲ 이슬람 스타일로 만들어진 사라예보 무슬림식당의 요리들.

유럽에서 맛보는 이슬람 요리

낯설고 물선 외국에서 독특하고 생소한 요리를 맛본다는 건 여행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의 하나다.

보스니아는 유럽 대륙에 위치해있음에도 이슬람교의 생활양식이 보편화된 국가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 음식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국민의 거의 절반이 무슬림이기에 그렇다. 사라예보에 머무는 관광객들이라면 한 번쯤 무슬림식당에 들러 이슬람 요리를 맛보는 것도 즐거운 체험이 되지 않을까.

◇ 독특한 향신료를 사용한 양고기와 닭고기 요리

돼지고기 먹는 걸 금기로 여기는 무슬림들은 단백질과 지방 보충을 위해 양고기와 닭고기를 즐겨 먹는다.

재료를 숯불에 구운 것에서부터 기름에 튀기거나 물에 끓인 것까지 요리방식은 수십 가지다.

아랍에서 건너온 향신료를 많이 사용하는 이슬람 고기 요리는 한국에선 느낄 수 없었던 색다른 맛과 향을 여행자에게 선물한다.

화덕에 구워 기름기가 없고 담백한 빵을 곁들이면 푸짐한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다.

다만 향신료 냄새에 민감한 사람은 먹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 이슬람 요리는 `무슬림 구역`에서

사라예보는 지금도 무슬림 구역과 가톨릭 구역으로 양분돼 있다.

터키 요리와도 비슷하고, 중동 음식과도 유사한 보스니아의 이슬람 요리는 당연지사 무슬림 구역의 식당에서 판매된다. 많은 미식가들로부터 “최고의 향신료”로 칭송받는 샤프란(Saffron)을 섞어 만든 향기로운 밥이나, 구운 가지와 토마토를 곁들인 양고기 스테이크를 맛보려면 무슬림 구역으로 가야한다.

가톨릭 구역에선 이슬람 요리를 맛보기 어렵다. 무슬림식당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친절한 보스니아 사람들이 웃으며 길을 알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 라마단 기간엔 식당이 문을 닫으니 주의

이슬람교도들이 `신성한 달(月)`로 여기는 라마단(Ramadan) 기간에는 모든 무슬림이 해가 떠서부터 질 때까지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다. 이 시기에는 거의 대부분의 무슬림식당이 일몰 때까지 문을 열지 않는다.

사라예보의 무슬림식당도 마찬가지다. 독실한 무슬림의 경우에는 이 기간에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물론, 담배도 피우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이슬람교도가 많은 지역으로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라마단 기간을 반드시 고려해 일정을 잡는 것이 좋다. 자칫하면 종일 굶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애주가에게 정보 하나 더. 무슬림식당에선 술을 팔지 않는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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