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 위에서
세르비아 ③

▲ 푸른 하늘 아래 드넓은 광장에서 오후의 여유를 즐기는 유럽인들.
▲ 푸른 하늘 아래 드넓은 광장에서 오후의 여유를 즐기는 유럽인들.

베오그라드 중앙역에서 금발의 호객꾼을 따라 도착한 숙소는 오래되고 깨끗하지 못했지만, 젊은이들이 내뿜는 열기로 인해 분위기는 더없이 좋았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온 대학생 10여 명이 단체로 묵고 있었고, 스물넷이라는 호스텔 주인의 친구들도 왁자지껄 모여 탄산음료에 독한 보드카를 섞어 마시며 뭐가 그렇게 좋은지 1분 간격으로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말하자면, 스페인과 포르투갈 청년 절반에 세르비아 청년 절반, 거기에 얼굴색이 다른 중년의 동양 사내 하나가 낀 풍경이었다.

나이로 보자면 그들은 기자의 조카뻘이지만, 서로가 초면인 여행자들에게 나이 차이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스페인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ovar)와 할리우드에서도 인정받은 스페인 여배우 페넬로페 크루즈(Penelope Cruz), 세르비아 출신의 테니스 스타 노박 조코비치(Novak Djokovic)와 한국 걸그룹 `소녀시대`의 이야기가 앞뒤 없이 오가는 가운데 모두가 잠을 잊었고 흥겨운 술판을 이어졌다.

그 시끌벅적한 술자리에서 기자를 숙소까지 데려온 여자가 호스텔 주인의 여자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거칠고 우락부락한 인상을 가진 세르비아 남자친구를 대신해 상냥한 말투와 호감 가는 인상으로 호스텔 손님을 끌어 모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세르비아인이 아닌 에스토니아 사람이라고 했다. 물설고 낯선 외국까지 와서 연인을 위해 쉽지 않은 호객 일을 자처한 여자. 역시, 사랑의 힘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강했다.

배낭여행을 하다보면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커플을 가끔 만나게 된다. 남부유럽 마케도니아에서는 이탈리아 여자와 벨기에 남자 커플을 봤고, 불가리아에선 체코 여대생과 핀란드 사내의 다정다감한 연애를 지켜보며 부러워했다. 뿐인가, 알바니아에선 기독교도인 독일 남자와 이슬람교도인 알바니아 여자 커플과 커피를 함께 마시기도 했다. 사랑은 인종과 국적은 물론, 종교까지도 뛰어넘는 위대한 것이란 걸 그들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됐다.

 

▲ 동유럽 거리 곳곳엔 돌을 깎아 만든 동상과 조각품이 흔하다.
▲ 동유럽 거리 곳곳엔 돌을 깎아 만든 동상과 조각품이 흔하다.

▲ 사랑하는데, 국적 따위가 무슨 제약이 될까

기자가 만난 커플에 한정시켜 말하자면 사랑에 빠진 이들에게 상대의 국적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였다. 아니, 그 이전에 서로 다른 국적은 연애를 시작하는데 방해요소가 될 수 없는 듯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자기 목숨도 상대방을 위해 내줄 수 있는 게 사랑인데.

등산과 수영 등 활동적인 레포츠를 즐기는 이탈리아-벨기에 커플은 가끔은 이탈리아어로, 때로는 프랑스어로 다음날 일정을 의논하며 옆에서 누가 보건 말건 10초당 한 번씩 키스를 하곤 했다. 체코-핀란드 연인은 남자가 두 살 아래인 `연상연하 커플`인데 누나(?)를 에스코트하는 남자의 모습이 의젓했다. `서로 다른 종교`라는 높고도 단단한 벽을 뛰어넘어 사랑을 나누고 있는 알바니아-독일 커플의 모습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한국과 달리 국경이 국경처럼 인식되지 않는 유럽. 그런 외부적 환경은 사람의 심성에도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닐까? 태어난 나라가 다를 뿐, 동시대의 공기를 호흡하며 유사한 고민과 희망 속에서 사는 젊은이들에게 “너는 인종과 종교, 국적이 같은 사람하고만 연애해야 한다”고 강변하는 건 규제나 폭력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거의 유일한 존재다. 사랑의 대상을 선택하는 것 역시 어떤 제약이나 도그마에 휘둘릴 필요가 없지 않을까.

조금은 방향이 다른 문제제기일 수도 있지만, 최근 한국에서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한국인 남성-외국인 여성`, `외국인 남성-한국인 여성` 커플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가진다면 색안경을 끼고 그들을 바라볼 이유가 없다. 전제나 조건이 붙어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란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 베오그라드 시내에선 다양한 형태의 소 조각상을 만날 수 있다.
▲ 베오그라드 시내에선 다양한 형태의 소 조각상을 만날 수 있다.

▲ `빛나는 시절`을 사는 베오그라드의 청춘들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 연인을 따라 에스토니아에서 베오그라드로 왔다는 금발의 호객꾼 여자와 괄괄한 성격의 세르비아 남자를 다시 만난 건 칼레메그단(Kalemegdan)이란 거대한 성(城)이 지척인 베오그라드 언덕 위에서였다.

도나우강과 사바강 물결이 쿨렁이며 합쳐지는 광경이 장관을 이루는 낭만적인 장소에 둘은 서있었다.

새벽까지 이어진 호스텔 호객에 지쳤을 에스토니아 여자의 어깨를 나긋나긋한 손길로 마사지 해주는 세르비아 사내의 모습이 190cm에 육박하는 커다란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한없이 귀여웠다. 간지러운 것인지 연인의 손을 가볍게 쳐내면서도 연신 행복한 웃음을 짓는 에스토니아 여자의 얼굴도 보기 좋았다.

그렇다.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20대 청춘의 빛나는 시절이라면 둘이 있는 곳이 곧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 그게 세르비아든 에스토니아든 한국이든. 그 빛나는 청춘을 허망하게 지나온 기자는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 베오그라드 중심가. 北京飯館(북경반관)이라 쓰인 한자 간판이 이채롭다.
▲ 베오그라드 중심가. 北京飯館(북경반관)이라 쓰인 한자 간판이 이채롭다.

아무리 많은 돈을 지불해도 청춘을 돌려주는 상점은 세상에 없으니까.

밀어(蜜語)를 속삭이는 둘에게 다가가 “늦은 점심이라도 함께 먹자”고 청하려다가 생각을 바꿔 발길을 멈췄다. 지금 저들의 배를 불리는 건 감자튀김이나 햄버거 따위가 아닌 둘만의 속삭임일 것이기에. 그 순간 그네들 사이에 끼어드는 건 주제넘은 일인 동시에, 눈치 없는 행동일 것이 분명했을 터다.

젊고 아름다운 에스토니아-세르비아 커플을 뒤로 하고 시내로 향했다. 세르비아는 한국과 비슷하게 외국의 침략을 여러 차례 겪었고, 내전의 상처 또한 안고 있는 나라다.

파괴와 재건을 거듭한 베오그라드의 역사 역시 한국의 수도 서울과 흡사하다. 인종과 종교가 야기한 야만의 과거를 추상적으로나마 떠올리며 천천히 걷고 있는데…. 저건 대체 뭐지?

도심 거리 곳곳을 소가 점령(?)하고 있었다. 소를 형상화한 조형물의 색깔과 질감·형태가 모두 조금씩 달랐다. 대체 저렇듯 많은 소를 조각해놓은 이유가 뭘까? 궁금증이 몰려왔다.

누구에게 물어봐야 명쾌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그러나, 여행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지, 해답을 내놓는 사람이 아니다. 며칠 더 베오그라드에 머물게 된다면 자연스레 그 이유를 알게 되겠지. 낯선 도시에서 낯선 바람이 불어왔다.

 

▲ 터키를 출발해 불가리아를 거쳐 세르비아까지 가는 기차.
▲ 터키를 출발해 불가리아를 거쳐 세르비아까지 가는 기차.

느려서 더 낭만적인 동유럽 기차여행

느긋하게 창밖 풍경을 보며, 유유자적 식사와 음료까지 즐길 수 있는 기차여행은 매력적이다.

한국이나 일본, 서유럽과 달리 동유럽 기차는 평균시속이 채 50km에도 미치지 못한다. 느리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 `느림` 속에는 많은 `낭만`이 숨겨져 있다. 만약 당신이 동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아래 코스에서 기차를 타보길 권한다.

비행기를 이용한 여행이나, 버스여행과는 전혀 다른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 세르비아를 포함한 동유럽의 주요 교통수단 중 하나인 노면전차(tram).
▲ 세르비아를 포함한 동유럽의 주요 교통수단 중 하나인 노면전차(tram).
터키 이스탄불 ↔ 불가리아 소피아

터키에서 수많은 이슬람사원을 둘러보고, 오스만투르크 문화의 향기를 느낀 여행자들이 유럽으로 넘어가기 위해 이용하는 열차여행 코스다.

보통은 밤늦게 이스탄불역을 출발해 다음날 오전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 도착한다. 기차 안에서 아시아와 유럽을 넘나드는 경험을 해볼 수 있다.

자정을 넘긴 시간에 터키-불가리아 입·출국사무소에서 긴 줄을 서보는 것도 평소에는 해보기 힘든 흥미로운 체험이다.

▲ 여행자에게 순진한 미소를 보내준 세르비아의 아이들.
▲ 여행자에게 순진한 미소를 보내준 세르비아의 아이들.
보스니아 사라예보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비극적 현대사의 생채기가 도시 곳곳의 총탄 자국으로 선명하게 남아있는 보스니아의 사라예보. 이 도시에선 많은 관광객들이 인간과 역사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보스니아에서 운행하는 열차는 낡았다. 그 열차에 몸에 싣고 베오그라드까지 달리는 8~9시간 동안 뭘 해야 할까?

기자의 경우엔 먹먹한 가슴을 달래기 위해 위스키를 마셨다. 창밖으론 `상처투성이 발칸반도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해바라기가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 동유럽 꼬마들이 길거리 공연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 동유럽 꼬마들이 길거리 공연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 헝가리 부다페스트

끊임없이 이어지는 진초록의 감자밭, 넓은 목초지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떼, 빨간 기와지붕 아래를 오가는 부지런한 농부들…. 세르비아에서 헝가리로 가는 기차의 창밖 풍경은 한국의 1970년대와 닮았다.

아름다운 전원풍경이 여행자의 감성을 자극한다.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진한 세르비아 꼬마들과 과자를 나눠먹으며 장난을 치는 것도 지루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한 방법이다.

이 기차여행의 끝에서 아름다운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만날 수 있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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