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어느날 내시를 불러 “황희 정승이 요즘 어떻게 사는 지 보고 오라” 했다. 다녀온 상선이 “초가집은 낡아 물이 새고, 하루 세끼 끼니를 걱정하는 지경이었습니다” 보고했다.

왕은 명을 내렸다. “오늘 남대문으로 들어오는 물품을 모두 사서 황희의 집에 보내도록 하라” 그런데 그날 따라 종일 비가 내려서 통행하는 상인이 없었는데, 저녁 무렵이나 되어서 촌로 한 사람이 계란 한 꾸러미를 들고 들어왔다. 신하들은 그것이라도 사서 대감의 집에 가져갔다. “이유 없이 이런 것 받을 수 없다” “어명을 거절할 작정이냐”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받았는데, 삶아보니 계란에 뼈가 생겨 있었다. 너무 오래 두어서 부화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때부터 “먹을 복 없는 자는 계란에도 뼈가 생긴다”는 말이 생겼고, 지지리 복 없는 사람을 일컫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지금도 명절(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생일날)에 계란 두 개씩 배급받는다고 한다. 탈북자들이 남대문 시장에서 계란더미를 보고 신기해 하면서 30개 들이 한 판을 사서 순식간에 다 먹어치운다. 돼지고기와 계란에 한이 맺혔는데, 별난 세상이란 것. 우리도 60년대까지는 계란이 명절 선물이었다.

1962년 “이화여대 기숙사는 매일 계란 후라이 한 개씩 나온다”란 탐방기사가 신문에 실렸는데, 사실은 입학생을 끌어들이기 위한 광고성 기사였다.

고 김수남 주교는 “나를 신부로 만든 것은 삶은계란이었다” 했다. 집에 신부님이 심방하면 어머니는 달걀을 삶아 대접했다.

소년 김수남은 “나도 신부가 되면 계란을 먹을 수 있겠구나”고 생각하고 신학교에 갔다는 것이다.

요즘은 `공장식 양계장`이 잔뜩 생겨서 라면에 계란 깨넣는 것이 예삿일이 됐지만, 올 겨울의 조류독감(AI)때문에 `닭값은 내리고, 계란값은 치솟는` 현상이 벌어졌고, 30개 들이 한 판에 1만원에 파는 설 선물세트가 나왔다.

계란이 명절선물로 등장하는 것은 반세기만이다. 수입계란으로 수요를 충당할 지경인데, `계란에 얽힌 추억`을 회상하는 것도 한 즐거움이다.

/서동훈(칼럼니스트)

    서동훈(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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