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재 무

선과 악의 기준이 사라진

오직 미추만이 가치를 결정하는 시대에

성자였던, 생을 긍정하는 가난은

선하지도 힘이 세지도 않다

산개되어 얼굴조차 볼 수 없는 가난은

다만 무력할 뿐이어서 크게 울지도 못한다

가난이 힘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

뭉쳐서 무기가 되고 전망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

떼지어 살고 있어서 쉽게 눈에 띄던 시절

가난은 단연 주목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가난은 저마다 무력한 개인이 되어

모래알로 흩어졌다 지하로 잠적해버렸다

눈에 띄지 않는 가난에 대하여

누가 관심과 애정을 보일 것인가

생활의 중증장애자, 구차한 천덕꾸러기 되어

몰매 맞는 가련한 왕따

가난은 이제 선하지도 힘이 세지도 않다

가난이 힘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궁핍이라는 것이 꿋꿋이 견디게 해주고 다시 일어서는 의지의 원동력이 된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시인의 말처럼 뭉쳐서 무기가 되고 전망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무력한 개인으로 전락하고, 도저히 일어서지 못할 지하로 잠적해 버린 것이다. 이제는 가난을 딛고 일어서려는 강한 의지력이랄까 염결한 정신적 가치마저 사라져가는 오늘의 현실을 아파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