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민호<br /><br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박경리 선생 문학에 대한 발표를 하고 돌아온 날, 나는 무슨 보고라도 하듯 벗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 속 벗의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들었지만 한 가지 뜻하지 않은 소식을 들려주었다.

우리 두 사람이 같이 아는 후배가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아뿔싸.

이미 밤이 늦은 탓에 다음날 아침 날이 밝자 전화를 했다. 후배의 목소리는 나쁘지만은 않았지만 직접 전해주는 소식은 더 좋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T세포성 림프종이라고 했다. 병원에서는 즉시 입원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병실이 다 차 있어 들어오라 하지를 않는다고 했다.

이날, 어느 작가의 소설 출판 축하 모임이 예정되어 있었다. 작품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을 전후로 하여 38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 간 기녀 시인의 삶을 그린 것이었다.

약속 시간이 되자 예정된 사람들이 거의 모두 참석했다. 기자간담회도 하고 한 해가 저무는 때 같이 글쓰는 친한 `도반`들도 만나서 그런지 작가의 표정은 몹시 밝았다.

우리는 모두 이 작가가 몸이 편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작품 출간을 더욱 크게 축하해 주고 싶었다. 이 문우들 모임에 언니 격인 이평재 작가는 보랏빛 장미 한다발을 가져 왔다. 이들 모두의 선생인 윤후명 작가도 오셔서 건배 제의를 해주셨다.

통증 때문에 오래 앉아 있기 힘든데도 작가는 오랫동안 함께 있으며 즐거워 했고, 우리들은 작품 구절들을 하나씩 읽어 보기로 했다. 나도 읽고 작가와 절친인 방현희 작가도 읽고 해이수, 김이은 작가도 다 읽은 후 작가가 직접 자신이 쓴 소설의 어느 부분을 읽었다.

“사실을 고하자면 참으로 분에 넘치게 복된 인생이었습니다.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뼈를 녹이는 사랑, 부리기 버거운 재주, 아름다운 산천 속에서 한 생 잘 살다 갑니다. 가장 큰 기쁨과 가장 큰 고통을 감당할 근기까지 받아 태어났으니 이번 생에서 무슨 불평을 입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잔은 차면 넘치고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니 복록도 충분히 누리고 나면 넘치기 전에 거둬들이는 것이 순리일 것입니다. 감사한 마음 가슴에 품고 떠납니다. 부디 모두들 강녕하시길 앙상한 부끄러운 두 손 모아 비옵니다.”

일동 모두 잠시 숙연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무거운 자리를 만들 작정들은 아니었기에 모두 박수를 치고 즐거운 얼굴로 이차를 가기로 했다.

막걸리집 이름이 `유목민`이라 해서 다들 애호하는 곳이지만 시간이 일러 열지 않았고, 그 못지 않게 좋아하는 `푸른별 주막`으로 향했다. 그때 소설가이기도 한 세계일보의 조용호 기자도 합류했다.

나는 모임을 주선한 사람답게 더 기뻐한 나머지 과음을 하고 말았다. 점심 때부터 시작한 자리가 여덟 시까지 가서야 파했다. 집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게 깨어나니 새벽 두 시였다. 자리에 누운 채 스마트폰으로 T세포성 림프종이라는 것을 찾았다.

“일반적으로 B림프종보다는 치료가 곤란한 것으로 되어 있다.”

가슴이 섬뜩해지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후배가 부디 쾌유될 수 있기를 마음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단 이틀 동안 머물렀던 겨울 러시아 페테르부르크를 가로지르는 강, 그 이름이`네바`라고 했다. 얼어붙은 그 강은 창백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오전 열 시가 되어야 날이 밝고 오후 세 시면 벌써 저물어 버리는 그 도시에 대해 어느 작가는 `밤은 또다른 태양`이라는 제목을 가진 소설을 썼다.

모두 쾌유되기를.

털고 일어날 수 있기를.

하지만 그렇게 될 수 없다 해도 나는 소설 속에서 기녀 시인이 당부한 것처럼 슬퍼하지만은 않겠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 또한 모든 사랑해야 할 죽어가는 존재의 하나인 까닭에. 그리고 살아 있는 그 시간 동안 내 모든 힘과 의지를 들여 사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다시 한번, 그러나 모두 무사히 털고 일어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