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세상이 다시 한 번 용틀임을 한다. 시대의 흐름이 바뀌려는 모양새다. 이때를 맞아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다시 한 번 제기된다.

그러자 난리다. 보수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느니, 진보세력은 이러저러해야 한다느니 하는 말이 흘러넘친다. 보수냐, 진보냐, 어떤 보수, 어떤 진보냐 하는 말이 신문지상, 인터넷 화면에 넘쳐난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보수주의자다, 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나`는 진보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보수고 진보고 이름이 보수요 진보일 뿐 진짜 보수, 진짜 진보가 무엇인지 과연 얼마나 알 수 있겠는가.

우리들은 이름이 주는 망상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비단 보수나 진보의 문제만이 아니요 모든 성별과 직책과 신분에 딸린 이름의 망상에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허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장이다, 노동자다 하는 미망에 갇혀 헤맨다.

시대적으로 보면, 1990년을 전후로 한 동구 사회주의권의 쇠망 이래 무엇이 보수요 진보냐, 어느 편이 왼쪽이고 오른쪽이냐 하는 문제는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청받게 되었다. 소련은 좌익 진보였는가? 중국은, 북한은, 지금 어떤 사회인가? 좌익인가? 그래서 진보인가? 무엇이 좌익이요, 무엇이 진보인가? 무엇이 오른쪽이요, 무엇이 보수인가?

고전적인, 그래서 진부하고 따분한 구분법에 기초해서 좌우를 가르고,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방식으로 이 21세기의 변화를 따라잡을 수 있겠는지? `나`는 보수다, `나`는 진보다 하면서 머리를 짚더미 속에 쑤셔 넣고 엉덩이를 뒤로 빼놓는 태도로 어떻게 새 세상을 읽을 수 있겠는지?

며칠 전 쿠바를 반세기 이상 통치해 왔다는 피델 카스트로가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뉴스가 세상에 타전된 날 인터넷의 한 댓글에 이런 말이 써 있었다. 독재체제를 무너뜨리고 나서 더 큰 독재를 행한 자라고.

물론 냉전시대였다. 한 작은 나라의 운명이 소련이나 미국 같은 양극의 두 강대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시대였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선택 같은 것이 없지 않고는 안되었다. 그러나 역사에서 변명은 쉽게 통하지 않는다. 미국이 독재체제를 지원하고 있었다고 해서 그것을 거꾸러뜨리기 위해 새로운 독재를 더 강한 방식으로 행한 것이 쉽게 용인될 수 있을까? 카스트로는 혁명가였고 영웅이었지만 항상 모든 것은 쉽게 반대의 극으로 전화된다. 그는 독재를 행하는 자, 새로운 시대의 가장 낡은 사람으로 인생을 마쳤다.

세상이 다시 한 번 바뀌려 하니, 모든 정치세력이 이 변화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몸부림을 친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변화를 요구하고 초래한 시민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보수인가? 진보인가? 시민은 보수가 무엇이고 진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알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광화문에 모인 백 만 인파가 원하는 것은 `비정상의 정상화`요, 상식의 승리요, 더 많은 민주주의일 뿐이다. 오랜 역사 경험으로 우리는 젊은 사람까지도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안다. 그러나 무엇이 보수고 진보냐 하면 그것은 이 시대에 여전히 어려운 질문 거리, 정답을 잘 모르는 문제일 뿐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이름뿐인 보수나 진보의 어느 한 개념, 그 개념의 진영 속에 밀어 넣고 만족해 하는 어리석음을 언제까지 범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프랑스혁명의 의회의 오른쪽, 왼쪽에서 유래한 좌우의 개념을 언제까지 내 것인 양 신봉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

그러나 이 헛된 물음에서 이익을 찾는 이들이 있으므로 세상은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