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9일 오후 한 시에 규장각에서 외국 손님을 맞아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 행사가 있었다. 독일에서 온 그 분은 25년이나 독일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에서 관장 일을 해 왔고, 이번에 정년 퇴직했다고 했다.

정조대왕이 세운 규장각은 요즘 들어 귀중한 고서들의 보존 처리 기술을 높이고 데이터베이스화 하는 문제에 관심을 쏟고 있고 이를 중심으로 독일, 프랑스, 일본 등 오랜 경험을 축적해온 외국 도서관, 박물관과 활발한 접촉을 갖고 있다.

규장각 고서 열람을 마치고 교수회관에서 가진 점심 식사 자리에 앉았는데, 무심코 휴대폰을 보니 속보가 떴다. 오늘 대통령 선거를 치른 미국에서 어제까지의 예상과 달리 트럼프가 우세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며칠 전에 미국 수사기관에서 힐러리의 이메일 스캔들을 재조사하겠다고 했을 때 미국에서도 이런 식으로 정치 개입을 하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는데 그 다음에 다시 무혐의 처리를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 번 한 수사를 다시 한다는 것도 이상했지만 이를 대통령 선거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재차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는 것도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어쨌든 그것으로 힐러리는 곤혹스러운 사태에서 벗어나 승리의 여건을 마련했다는 것이 한국 내 여론의 방향이었다.

한국 문제가 워낙 복잡하고 급속하게 전개되고 있는지라 사실 미국 대통령 문제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트럼프가 이런 정도로 선전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주 의외라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여론조사며 뉴스 같은 것이 힐러리 쪽을 점치고 있었기 때문에 별 급작스러운 변동이야 있으려나 했다.

한 시 넘어서자 트럼프의 승률이 힐러리에 비해 훨씬 높고 곧이어 87%나 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는 점심식사 좌중의 진지한 분위기도 조금 돌릴 겸 미국 대통령 선거 속보를 독일에서 온 관장님 부부, 그리고 규장각 원장님께 전해 드렸다. 누구보다 놀란 것은 독일인 부부보다도 그 자리에 초청 주역이자 통역 역할까지 겸해서 앉아 계시던 전영애 교수였다. 너무 놀라신 나머지 통역을 이어가시는 일조차 잊으시는 것을 보니 트럼프 소식이 놀라운 일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독일에서도 한국처럼 대체로 트럼프보다는 힐러리를 선호했던 모양이었다. 독일 관장님은 유럽인들이 미국에 가서 대통령을 뽑을 수도 없으니 큰일이라고 농담을 하셨고, 매우 놀라운 일이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함께 식사를 하시던 관장 사모님도 부군과 정치적 견해가 다르지 않은지 당황해 하시는 표정이 역력하기는 마찬가지.

식사가 끝나고 그 분은 강연을 하시러 가고 나는 수업을 하러 강의실로 갔다. 강의실에서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생각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수업 직전에 보니 트럼프가 승리할 가능성이 95%나 된다고 했고 수업 끝나고 나와서 보니 드디어 트럼프가 승리했고 수락연설을 한다는 뉴스까지 떠 있었다.

트럼프가 온다. 온다? 온다! 내게는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힐러리를 특별히 좋아한 것은 아니지만 최초의 흑인 대통령 다음으로 미국에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보겠다는 기대 심리도 없지 않았고 트럼프가 대통령 되면 한반도에서 미군을 빼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컸다. 더구나 한국에 알려진 트럼프는 인종차별주의에 종교차별주의, 거기에 온갖 추문까지 얽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쪽으로 이미지화 되어 있었다. 화면을 통해 보이는 그는 얼굴이 붉고 흥분 잘하고 독설과 즉언을 일삼는 사람 같기도 했다. 그런데 미국의 백인 저학력자들, 남성들이 그런 그에게 대거 몰려 갔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들의 좌절감이 크다고도 했다. 미국 소식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미 예상된 일이었다고도 했다.

힐러리에 대한 막연한 동정심과 기대 심리를 버리고 냉정하자고 생각한다. 세상이 또 한 번 이렇게 배를 뒤집으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것 같다. 우리는, 한반도는 과연 어떻게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