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과 시 창작 수업을 함께하고 있다. 지난주는 중간고사 기간이었는데, 과제물로 시험을 대체해서 수업을 쉬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휴강한 덕분에 모처럼 며칠 시간을 내 충주, 대구, 남원을 거치며 낚시를 즐겼다. 실컷 놀 수 있어서 휴강이 좋은 건 아니었다. 학생들한테 시에 대해 말한다는 게 부끄러워 그랬다. 시인들이 아름답지 않은데, 시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차마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매일 폭로가 업데이트되고 있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꿔 끔찍한 기억을 증언하는 피해자들의 언어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혼자라서 외롭던 이들이 서로 손잡아 견고한 연대를 이루고 있다. 폭로가 무서운 자들은 밀려오는 파도를 피한답시고 반성문을 써 올리고, 피해자에게 종일 연락을 시도하며 용서를 구했다. 앞에서는 점잖은 척, 뒤로 저질러온 비도덕적 말과 행동들이 세상에 명백해지자 어디론가 밀항을 시도하는 중이다. 하지만 피할 곳은 없다. 마땅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

학생들에게 낸 과제는 `우리 시의 아름다운 시어를 찾아서`이다. 학생들이 제출한 리포트 중에 최근 성폭력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시인들의 시도 몇 편 보인다. 당혹스럽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무슨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다 그런 건 아니라고, 안 그런 시인들이 훨씬 많다고, 침소봉대하지 말라고, 시와 시인은 별개라고 말해야 할까? 너무 비겁하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들 중에는 내가 잘 아는 이도 있다. 그의 행실에 대해 전해들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직접 보고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른 체했다. 침묵과 방관은 가해를 동조하는 일이다. 아프게 반성해야 한다.

남자 시인이 시를 가르쳐준다며 여자 습작생을 불러 성폭력을 저질렀다. 피해자 중에 미성년자도 있다. 평소 동경하던 시인을 만난다는 설렘으로 반짝였을 마음을 생각하면 가슴 아프다. 몇몇 시인들은 그 마음의 투명한 데를 파고들어 `등단`이니 `입시`니 `문단` 운운, 알량한 권력을 과시하며 협박했다. 그 권력구조의 무게에 짓눌려 깨져버린 꿈들, 찢긴 상처들이 너무 많다. “나는 돌아왔지만 내 꿈은 돌아오지 못하고”라던 이성복의 시구가 떠오른다. 일부가 아니라 전체가 같이 분노하고 아파해야 하는 일이다. 개인 인성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 잘못된 구조 안에서 수많은 묵인과 방조, 외면이 암세포처럼 자라나 썩은 것이기 때문이다.

시를 가르쳐줄 수 있다는 그 오만한 생각부터 바꿔야한다. 시는, 옆에서 도울 수는 있어도 가르칠 수는 없다. 나도 과외를 한 적이 있지만 부끄러워서 금방 그만 뒀다. 지금 학생들과 함께 하고 있는 시 창작 수업의 목표는 `시 쓰는 기술보다 시 쓰고 싶은 마음을 위해서`이다. 목표대로 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문예창작과에서 문학을 공부한 내가 스승에게 배운 것은 시가 아니라 시 쓰는 사람의 태도, 시 쓰는 정신이었다.

태도는 가르칠 수 없는 자들이, 정신은 가르칠 수 없는 자들이 고작 시 찍어내는 기술이나 전수하면서 제 지위와 힘을 이용해 추악한 짓을 일삼는 게 지금 문단의 자화상이다. 낯 뜨겁다고 해서, 제 발 저리다고 해서 누구도 이 치욕을 부정해선 안 된다.

내일모레면 학생들과 다시 만난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시에 환멸을 느낄 학생들에게 여전히 시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해줘야 할 텐데. 밥 딜런의 노래를 내내 들려줄까, 시인이 되고 싶은 우편배달부와 파블로 네루다의 우정을 그린 영화`일 포스티노`를 보여줄까. 아니면 백련산 단풍 그늘에서 야외수업을 할까. 시 쓰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심어줄 수 있을까.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이성복, `그날`)은 마을로 오라고, 차마 손짓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