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의 맛 모르고 먹지마오
여름이 익어간다, 복숭아가 익어간다

▲ 환하게 연분홍 등불을 밝힌 듯 피어난 복사꽃은 비단 시인만이 아닌 보통 사람들의 마음도 설레게 한다.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난 시인 이육사는 고향의 여름을 이렇게 읊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역사에는 `만약...`이란 게 없다지만, 만약 육사가 영덕에서 태어난 작가라면 “내 고장 칠월은 복숭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 노래하지 않았을까?

비단 시인만이 아니다. 인간 모두에게 유년의 기억은 지울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섭씨 35도를 오르내리는 뜨거운 여름. 가만히 앉아 있어도 셔츠가 땀으로 젖는 계절이다.

열대야로 인한 불면증을 호소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 여름이 더없이 반가운 사람들도 있다.

바로 영덕의 복숭아 재배 농민들.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분홍색으로 예쁘게 익어가는 복숭아를 보면 한여름 더위와 스트레스가 모조리 날아가 버린다.

25년째 복숭아 농사를 짓고 있는 박형식(53)씨는 `영덕의 진미`인 잘 익은 커다란 복숭아를 들어 보이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 ① 땀의 결실인 복숭아를 수확하며 환하게 웃는 영덕의 농민.
▲ ① 땀의 결실인 복숭아를 수확하며 환하게 웃는 영덕의 농민.

“한 번 보세요. 다른 곳에서 이런 복숭아를 본 적이 있습니까? 영덕 복숭아는 크기도 크기지만, 당도가 높아서 한입 깨물면 꿀물을 마신 것 같습니다.”

어렵지 않게 수질 좋은 농업용수를 구할 수 있는 천혜의 환경.

거기에 적당히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풍부한 일조량은 영덕의 복숭아를 아삭아삭한 식감과 뛰어난 풍미로 익어가게 만든다.

맛과 향기로 입과 코를 동시에 자극하는 복숭아는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여름 과일의 여왕`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복숭아 농사를 지었습니다. 멋도 모르고 털복숭아를 옷에 문질러 먹다가 두드러기가 나기도 했지요. 그래도, 그 시절이 좋았습니다.” 복사꽃 피는 언덕에서 보낸 유년이 떠오른 듯 이제는 중년의 사내가 된 박형식 씨의 표정에 그리움이 묻어났다. 영덕 농민들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복숭아가 타 지역에서 재배되는 복숭아보다 맛있고 향기로운 이유는 뭘까?

 

▲ ② 영덕 복숭아를 수확해 선별작업을 하고 있다.
▲ ② 영덕 복숭아를 수확해 선별작업을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일조량의 차이로 해석한다. 아래는 영덕농협 복숭아공선회 이공규(62) 회장의 설명이다.

“통상 전국 연평균 일조량은 대략 2300여 시간입니다. 그런데, 영덕은 2700시간이 넘습니다. 거기다가 비도 적게 내리는 편입니다. 당도가 적당하고 비타민C 함유량이 높은 영덕 복숭아는 이런 재배조건에서 탄생하는 겁니다.”

자연적인 조건 외에도 영덕군은 복숭아의 품질 향상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관수시설 확충과 버팀대 개량 등의 재배환경 개선사업을 지원하고, 우량 품종의 복숭아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더 나은 맛과 향을 가진 복숭아를 생산하려 애쓰고 있지요”라는 게 이 회장의 부연이다.

영덕 복숭아의 미래를 위한 투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 ③ 영덕을 찾은 관광객들이 맛있는 복숭아 앞에서 즐거워하고 있다.
▲ ③ 영덕을 찾은 관광객들이 맛있는 복숭아 앞에서 즐거워하고 있다.

공동선별을 통한 품질의 균일화와 지역 복숭아 브랜드를 통합해 명실상부한 특산품으로 자리매김 시키려는 시도는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사실 복숭아는 오래 전부터 `신선의 과일`로 불렸다. 하얗고 긴 수염을 기른 신선들이 학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바둑을 두던 계곡.

그 계곡에 들어서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주던 게 바로 복숭아나무였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운 이상향이나 별천지를 `무릉도원`(武陵桃源·`桃`는 복숭아 또는, 복숭아나무를 의미)이라 부른 것만 봐도 옛사람들 또한 복숭아를 진귀한 과일로 생각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무속인들은 복숭아나무 가지로 만든 회초리가 악귀를 쫓는다고 믿었다.

신선이 아끼는 신성한 나무이니, 사악한 기운을 가진 잡스러운 귀신이 이를 두려워할 것이란 이유에서였다.

복숭아의 원산지는 고대 중국이다. 일부 중국인들은 복숭아의 외형이 미인의 풍만한 엉덩이를 닮았다고 믿었다.

 

▲ ④ 포장을 마치고 여름 식객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영덕 복숭아.
▲ ④ 포장을 마치고 여름 식객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영덕 복숭아.

해서, 농담처럼 복숭아를 “양귀비의 둔부”라고 칭하기도 했다. 실크로드를 따라 페르시아와 유럽으로 전해진 복숭아는 동서양 사람들에게 두루 사랑받았다.

한국에서도 예부터 복숭아를 길러 먹었으나, 판매를 위한 상품으로 본격적인 재배가 시작된 것은 1900년대 초반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영덕에서도 복숭아와 관련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1959년 거대 태풍 `사라`(Sarah)가 한국을 덮쳤다.

영덕 역시 태풍의 위력 앞에 완벽하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농경지 대부분이 침수됐고, 논밭은 밀려온 모래와 자갈로 인해 황무지로 변했다.

그러나, 전화위복이었을까? 사질토로 변한 토양이 복숭아 재배에는 최적의 조건이 돼주었다.

영덕이 `향기로운 복숭아의 고장`으로 이름을 높인 배경에는 아이러니하게도 태풍 사라가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수난 속에서 찾아온 기회를 영덕군청과 농협연합사업단은 놓치지 않았다. 영덕 복숭아의 전국화를 위해 `복사꽃선녀 선발대회`와 `영덕 복사꽃 큰잔치` 등의 홍보 이벤트를 열었고, 수도권에서 시식행사도 수차례 개최했다. 세상사 모든 일 속에는 명암이 더불어 존재한다. 영덕의 복숭아 농가에도 어두운 그늘은 있다. 갈수록 줄어드는 농촌 젊은이들로 인한 노동인력의 고령화는 작지 않은 문제다.

복숭아 재배에선 순차적 작업이 중요한데, 부족한 일손으로 인해 작업의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빈번해지고 있다.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영덕군과 영덕농협 복숭아공선회 등은 복사꽃이 피는 시기와 복숭아 수확시기에 필요한 인력수급 대책에 골몰하고 있다.

이는 면역력을 높이고, 어혈(瘀血)과 변비를 예방하며, 니코틴을 포함한 몸 속 독소제거에도 효과가 있는 품질 좋은 복숭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햇빛 눈부신 영덕의 야트막한 산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환청처럼 노랫소리가 들려올 것 같다.

고전·현대 아울러 많은 시인들에게 시심(詩心) 선물한 복숭아

탐스럽고 매혹적인 생김새와 여름날 더위를 잠시나마 잊게 만드는 싱그러운 향기, 거기에 달콤한 맛까지 삼박자를 갖춘 과일 복숭아. 세상과 사물을 예민하게 관찰하고, 그 결과를 문장으로 옮기는 걸 업으로 삼는 시인묵객(詩人墨客)이 복숭아를 지켜만 봤을 리 만무하다.

복숭아는 고전과 현대문학 속에 무시로 등장해 독자들의 마음을 연분홍 빛깔로 설레게 했다.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772~846)는 大林寺 桃花(대림사 도화)를 통해 복사꽃을 노래한다.

人間四月芳菲盡(인간사월방비진) 山寺桃花始盛開(산사도화시성개) 長恨春歸無覓處(장한춘귀무멱처) 不知轉入此中來(부지전입차중래). 풀어 쓰면 이런 내용이다. “사람세상의 꽃은 이미 졌는데 / 산중의 복사꽃은 이제야 피었구나 / 가버린 계절을 안타까워했는데 / 봄이 여기서 몸을 숨겼을 줄이야.”

복숭아가 열매 맺기 전 피는 복사꽃 한 떨기를 봄 전체로 은유한 백거이의 시는 고대 중국 낭만적 시풍(詩風)의 한 절정을 보여준다. 자연을 통해 삶의 본질을 읽어내는 보기 드문 절창이 아닐 수 없다.

대구 출신의 시인 이상화는 관능을 키워드로 복숭아를 관찰한 듯하다. 1923년 발표된 `나의 침실로` 서두를 읽어보자.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가련도다. / 아,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水蜜桃)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오너라.”

모두가 알다시피 수밀도는 복숭아를 달리 이르는 단어다. 애틋하게 그리는 여인 혹은, 조국을 복숭아 닮은 가슴으로 표현한 이 작품에선 이상화 초기 시들에서 발견되는 탐미성과 전위성을 확인할 수 있다.

경북대학교에서 독문학을 공부한 시인 송찬호는 제목부터가 `복숭아`인 시의 마지막 연을 이렇게 쓴다. “식탁 위에 놓여있는 한여름 밤의 꿈.”

수많은 과일을 맛볼 수 있는 여름철에 복숭아 하나만을 독점적으로 지칭해 `한여름 밤의 꿈`이라 노래했으니, 복숭아의 향기와 맛이 얼마만큼 큰 힘으로 시인을 매료시켰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원로시인 이생진(87) 역시 복사꽃을 특별히 아낀 것 같다. “나는 가끔 오래된 혼백과 이야기하는 수가 있다 / 북한산 유일한 복사꽃 나무 밑에서처럼...(중략) / 이걸 못보고 봄이 왔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찬란한 봄의 기운을 온몸으로 빨아들이는 시간이 지나고, 이윽고 여름이 오면 꽃이 떨어진 자리에서 탐스런 과일로 익어가는 복숭아. 이생진은 누구도 함부로 거부할 수 없는 시간의 도저한 흐름을 복사꽃송이에서 본 것이다.

무궁무진한 시의 소재. 그 속에서 시인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온 복숭아와 복사꽃. 앞으론 어떤 젊은 시인이 복숭아 향기롭게 익어가는 여름을 노래해줄까.

영덕 /이동구기자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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