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1주년 잊혀진 미주 이민 1세대를 찾아서
⑵ 미 중가주 리들리에 묻힌 孤魂(고혼)들

▲ 하와이를 거쳐 리들리에 1904년께부터 유입된 초기 한인 이민 노동자들이 독신으로 쓸쓸한 말년을 보내던 하숙집 터에서 바라본 옛 한인교회의 모습. 이민선조들이 직접 건립한 이 교회는 이후 매각돼 지금은 멕시코 교회이다.

미국 중부 캘리포니아를 일컫는 중가주는 우리에게 다소 생소하다. 로스앤젤레스(LA) 한인사회로 상징되는 남가주와 샌프란시스코가 중심인 북가주는 미국을 대표하는 이미지인듯 우리에게 친숙하다. 하지만 중가주는 1903년부터 1905년까지 이어진 하와이 농업 이민 1세대 한인들이 북가주를 통해 미 본토에 입국해 남부로 이동하며 전역에 250만 교민을 형성하기 까지 중요한 역할을 한 해외독립운동 사적지이다. 오죽했으면 교민사회에서 `미주 한인 이민역사의 성지`라는 평가까지 나오겠는가. 이들은 비록 역사에서 이제 거의 잊혀졌지만 비천한 신분과 가난 속에서도 이름 없는 해외독립 유공자의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이제 리들리와 다뉴바를 중심으로 한 중가주 한인 이민사를 복원하는 일은 과거의 거울에 내일의 길을 비추는 모색으로서 그 의의가 충분하다.


하와이 첫 공식 이민자 중 2천명 美 본토 밟아
당시 한인 전체 이민자 3분의 1이 중가주 정착
리들리엔 안창호·다뉴바엔 이승만이 거점 삼아
경쟁적으로 관리하며 독립자금 거둬 들여

이민 1세대 중 경주출신 매장기록 유일한 김경선
29세 청년 시절부터 농장 날품팔이로 늙어간 뒤
환갑 나이에 스스로 목숨 버린 한많은 生 안타까워

□ `포와`에서 `상항` 거쳐 `딴유바`까지

자동차로 LA를 출발해 우리 고속도로와 같은 5번과 99번 프리웨이를 3시간 가량 달리면 다뉴바이며 다시 30분을 더 가면 리들리가 나온다.

전형적인 농촌도시인 이곳은 킹스리버(King`s River)가 공급하는 풍부한 용수와 일조량, 밤낮의 기온차가 심한 분지의 지형으로 인해 `미국의 과일바구니`로 불릴 만큼 과수 농업이 발달돼 있다.

이번 현지 취재 기간 중 직접 차를 몰아 달려본 도로변에는 복숭아와 오렌지, 아몬드 등 갖가지 유실수가 끝 없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가까이 접근해보면 나무 아래에는 노동력 부족으로 수확되지 않은 낙과들이 부지기수였다.

 

▲ 버지스호텔 입구의 기념 동판은 국가보훈처와 다뉴바시 지원금, 교포들의 성금으로 제작됐다.
▲ 버지스호텔 입구의 기념 동판은 국가보훈처와 다뉴바시 지원금, 교포들의 성금으로 제작됐다.

이제는 히스패닉들도 취업을 주저할 것 같은 이 과일 수확 임노동자들의 선조는 지난 1904~1905년께부터 시작해 1930년대 무렵, 한때 300~500명이 모여 살았던 한인 이민자였다.

LA 거주 사학자 이자경씨 등의 연구에 따르면 이른바 `포와`(하와이)에서 근로기간을 마친 한인 임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귀국이나 하와이 잔류, 미 본토 입국 등 다음 행선지를 선택할 수가 있었다.

그 결과 하와이 첫 공식 한인 이민자 7천500여명 중 1천500~2천여명이 `상항`(샌프란시스코)을 통해 미 본토를 밟았다. 이들은 곧바로 솔트레이크시티 등의 대륙횡단철도 공사현장이나 덴버의 광산에서 중노동을 하거나, 하루 일당 1~2달러로 다소 낮지만 리들리와 `딴유바`(다뉴바)의 포도나 오렌지 농장에서 과일 수확을 했다.

극히 드문 사례지만 1909년에는 박제순이 유타주에서 현지인의 토지를 빌려 사탕수수를 직접 재배하기도 했다. 한인들은 본토 입국 후 초기 5년 동안 성실하게 삶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버지스호텔은 교포들에게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리들리와 다뉴바를 자주 방문한 도산 안창호와 이승만 박사가 이용해 유서 깊은 곳이지만 현재는 빈건물로 매각이 추진되면서 사라질 위기에 있다.
▲ 버지스호텔은 교포들에게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리들리와 다뉴바를 자주 방문한 도산 안창호와 이승만 박사가 이용해 유서 깊은 곳이지만 현재는 빈건물로 매각이 추진되면서 사라질 위기에 있다.

□ 국민회와 동지회의 주무대

중가주 한인 커뮤니티의 규모가 가주 전체 한인의 3분의 1을 점할 만큼 성장하자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양대 거두였던 도산 안창호와 우남 이승만이 지나칠 리가 없었다. 이들은 각기 노선을 달리해 사사건건 시비가 끊이지 않았으나 경쟁적으로 리들리와 다뉴바의 한인사회에 정성을 쏟았다.

결국 리들리는 안창호의 계열인 대한민국민회가, 다뉴바는 이승만이 중심인 동지회가 각각 거점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이 때의 감정으로 인해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자 리들리의 한인들은 한국 입국 비자를 받지 못할 만큼 불이익을 받았다는 말이 생겼을 정도이다.

□ 독립지원 이면에 일탈의 양면도

상해 임시정부의 활동은 미주 한인들의 독립성금에 크게 의존할 만큼 공헌도가 컸다. 대부분이 독신자인 한인 노동자들은 `먹고 남은 것은 조국 광복운동 후원에 바쳤다`(김원용 저 `재미 한인 50년사`)고 할 만큼 열성적이었다. 하지만 힘든 노동과 가족의 위안도 받을 수 없었던 처지에서 이들 가운데 일부는 도박과 마약에 빠지고 살인과 폭행 등 범죄와 일탈의 심각성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노동력을 상실한 은퇴 한인 이민자들은 리들리 한인교회 앞 한인이 운영하던 하숙집에 집단 거주하며 열악한 의식주로 연명하다가 일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임종 조차 지킬 이가 없는 비참한 삶을 살았다.

 

▲ 리들리 공동묘지에 안장된 이민 1세대 한인 부부의 묘비. `경북 대구` 출신인 부인 `김남이`는 미국식으로 남편의 성씨를 따 `왕남이`로 기재돼 있다.
▲ 리들리 공동묘지에 안장된 이민 1세대 한인 부부의 묘비. `경북 대구` 출신인 부인 `김남이`는 미국식으로 남편의 성씨를 따 `왕남이`로 기재돼 있다.

□ 경주사람 김경선의 흔적을 찾아서

이번 취재에서 리들리와 다뉴바의 공동묘지에 안장된 미주 한인 이민1세대 가운데 매장기록이 확인된 유일한 경북 경주 출신 김경선<본지 18일자 1면 보도>의 행적을 거슬러 가는 일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미국 중가주의 작은 농촌도시 다뉴바의 공동묘지에 쓸쓸히 잠든 그의 존재는 지난 6월14일(현지 시간) 오후 현지 안내를 맡은 한 교민이 건네준 명단을 통해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애국선열 명단`제목을 단 11쪽 분량의 이 묘지 기록에 기재된 한인 1세대 매장자는 리들리 189명, 다뉴바 58명 등 모두 247명으로 생몰 연대와 출신지, 사인(死因) 등이 담겨 있었다. 물론 성씨만 기재되는 등 미확인자도 적지 않았다.

출국 전 이미 국내 취재에서 제물포항을 통해 하와이로 농업이민을 떠난 7천500여명의 출신지 중 경상도가 세 번째이며 그중에서도 경주 출신이 가장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기자의 눈에 김경선이 띈 것이다.

유일하게 `경주`가 기재된 그는 1874년생으로 1934년 4월28일, 만 59세에 사망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생을 접었으며 `중가주 독립당에서 장례`를 치렀다고 기록돼 있었다.

한인 매장자 가운데 그리 드문 사인은 아니었으나 확인된 유일한 경주사람이니 자연히 행적에 관심이 갔다. 이어 다음날 방문한 다뉴바에서 묘비 하나로 남은 그를 뭉클한 마음으로 만날 수 있었다.

이 쓸쓸한 사내는 누구이며 어떤 일이 있었길래 머나먼 고국의 나이 60세가 된 해에 생을 버렸던 걸까?

18일 귀국한 뒤 곧바로 경주시에 취재를 했으나 동명이인은 있을 뿐 1874년생은 없었다. 미심쩍은 생각에 포항시에도 문의했으나 답변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번 취재의 시작 지점이었던 인천의 한국이민사박물관에 도움을 청했다. 얼마 뒤 이메일 답변은 실망스러웠다.

 

▲ 리들리와 다뉴바묘지에 안장된 이민선조 조사  명단 가운데 경주의 연고가 확인된 김경선의 기록.
▲ 리들리와 다뉴바묘지에 안장된 이민선조 조사 명단 가운데 경주의 연고가 확인된 김경선의 기록.

`같은 이름이 모두 8명 확인되지만 출생년도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첫 보도를 해야 하는 11일이 코앞에 다가오는데 속이 탔다. 하지만 흔한 이름이 아닌데도 8명씩이나 확인된다는 점에 의문이 들어 다시 용기를 내어 재확인을 요구했다.

며칠 뒤 이현아 학예사로부터 놀라운 답변이 왔다. `미국 측 도착자 명단에서 재확인을 해보았더니 경주시가 아닌 상세 거주지로 □ Dong으로 기록된 김경선이라는 이름이 검색`된다는 것이다. 이 학예사는 `1904년 9월 26일 몽골리아(Mongolia)호로 하와이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도 덧붙였다.

그렇다. 김경선이 경주 시내인 노동동에서 살았다는 사실은 확실해졌다. 29세의 청년으로 하와이로 건너간 그는 다시 본토로 건너가 농장의 날품팔이로 늙어간 뒤 끝내 외로운 삶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그에 대한 더 이상의 확인은 미뤄두기로 했다. 잘만 하면 그의 혈족들을 찾아 보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은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가 마지막 눈을 감던 순간, 먼 시절 이역만리 경주의 토함산에 걸렸던 뭉개구름과 알천변의 물놀이, 반월성지의 첫사랑을 그리워했으리라는 추모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비록 자신은 비루한 처지 속에서 떠돌이로 생을 마쳤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가난한 주머니를 열었으며 이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후손들이 있다면 안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임재현기자 imj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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