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민건<br /><br />대구대 교수·영어교육과
▲ 강민건 대구대 교수·영어교육과

올 여름 날씨 변덕이 심한 것을 보니 겨울채비를 일찍 해야 할 것 같은 괜한 걱정이 든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의 동네어귀 아름드리 큰 팽나무는 오슬오슬 추위를 잘 타는 나에게 아주 좋은 바람막이였다. 성인이 되고 나서 한참 후에야 방학을 틈타 내려갔던 고향의 그 나무는 이제 시가지 확장으로 없어진 지 오래되었고 지금은 내 기억 속에만 옮아와 살고 있다. 내 기억의 흐릿한 회색 풍경 속에 짙은 초록의 뚜렷한 자태로 서 있는 그 늙은 나무는 겨울철 모진 계절에 시달려 한쪽이 모지라졌지만, 봄에는 아름드리 꽃구름을 피워 올리고 여름에는 무성한 잎으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소나기처럼 귀청 따갑게 왁자하니 쏟아지던 매미 울음소리와 함께 팽나무는 이제 한편의 수채화처럼 기억 속에서만 내 마음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순진했던 시절의 기억 따위는 세상살이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편의점에 진열된 상품처럼 인간이 취급되는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약간의 위세를 부리고 스승이라는 명목으로 세상살이와 정치와는 일정정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위선으로 대학 안에 갇혀 살아가고 있지만, 지금의 우리 학생들을 애써 꾸짖거나 외면하고 싶지는 않다. 시대가 다르다고 나의 대학생활과 지금의 학생들을 비교해가며 안타까운 척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태도는 나의 보잘 것 없는 허세와 위선에서 나온 것이다.

현대사회는 열린사회이고 다양성이 인정되는 공간이라고 가정한다면, 비인간적인 무한 경쟁과 자본으로 무장된 대학의 삶은 무색해 보인다. 그 안에서 `행복과 꿈`을 부르짖으며 자신들의 다양한 삶을 요구하는 이들에게는 이 사회와 대학은 `열린사회의 적`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동물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으로 남고자 한다면 오직 하나의 길, 열린사회로의 길이 있을 뿐이다” 는 포퍼의 말이 무색해 보이는 순간이다. 동물적 사회에 대항하여 그저 본능적으로 살고자하는, 원시적 사고의 틀은 뉴스에 비춰지는 온갖 범죄와 인간이 서로에게 적이 되는 공간을 양산하기도 한다.

오늘날 대학은 교육부가 제시하는 사업과 자본으로 암묵적인 서열화를 경험하고 있으며 각 대학의 특성화된 학문 구조와는 무관하게, 프라임 사업, 코어 사업, 에이스 사업 등과 같은 프로그램 제목마저도 난해한 사업들을 유치하기에 여념이 없으며, 대학과 정부, 자본이 잠재적인 공모자가 되어 온갖 교육 사업 모델을 단지 학생들에게 실험하는, 교육이념이 상실된 실험장으로 전락하고 있다.

“열린사회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확보되고, 개인이 그 이성에 의해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책임지는 사회이다.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정책을 발의할 수 있다 해도 우리 모두는 그것을 비판할 수 있다”는 포퍼의 말을 통해서, 오늘날 대학교육현장의 문제와 관련한 극단적 결정에서도 열린사회의 적을 본다. 대학은 지나친 교육 경쟁정책을 건강하게 비판하지 못하게 하는 경쟁으로 학생들의 입을 틀어막고, 학점과 등록금의 은밀한 거래를 부추겨 `감시와 처벌`의 시스템을 완성한다. 이 감시와 처벌 안에서 아이들에게 건강한 사고와 비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 거래가 완결된 이후의 학생들의 삶은 비루하거나, 자본의 노예가 되거나, 혹은 대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유난히도 더운 올 여름, 한가롭게 연구실에 앉아 기우와 공상을 하는 동안, 가을학기의 등록금을 벌어보겠다고 학교를 등지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고난한 땀을 몸에 적시고 있을 아이들에게 도저한 청춘의 삶과 사랑은 이미 물 건너갔을 일이고, 정치공약으로 난무하는 최저임금보장은 아이들이 근근이 모으고 있는 등록금과는 거리가 있다. 문득 아이들에게, 어린 시절 든든한 그루터기가 되어 주었던, 팽나무가 되어주지 못한 내 처지가 미워지기 시작한다. 올 가을은 피어 오르기도 전에 시들어가는 아이들의 시선이 따가울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