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최초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전경.

소백산 기슭에 울려 퍼지던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지금도 소백고을 곳곳에 메아리치며 온누리에 울려 퍼지는 듯하다. 한국 문화의 중심은 선비정신일 것이다.

현대 우리 사회에 선비정신과 문화의 중요성이 다시 언급되는 것은 물질이 중심이 되는 실리주의적·실용주의적 사회의 일방적인 구조에서 시대적 사명감과 명분의 중요성이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일 터다.

이런 문제점과 현대와 과거가 어우러진 새로운 패러다임의 재구성을 위해 영주시는 선비정신의 계승 발전과 선비 문화의 재조명에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를 통해 현대사회의 정신적·문화적 변화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사명감·책임감으로 대변되는 한국 대표 정신문화 `선비문화`
실리·실용주의적 현대사회에 정신적·문화적 새 정체성 접목

□ 선비란

선비는 인격과 학문과 경륜을 갖추고 초야에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학문에 몰두하며 현실정치를 비판하는 사람을 이른다.

이를 산림유(山林儒)라하고,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아가 등용이 되면 개인의 영욕보다는 나라의 안위를 위해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경세제민하는 선비를 묘당유(廟堂儒)라고 한다. 선비는 항상 자신을 반성하고, 행위를 자제하며 인격을 도야하고, 지절을 숭상해 고고한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선비는 깊고 넓은 학문을 닦아 자연의 이치와 인생의 도리를 터득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해 이(理)와 연부(然否)와 사(事)의 시비(是非)를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진리관을 가져야 한다.

또한 선비란 인류문화에 관한 자기의 소임을 깨달아 포부와 경륜을 품어 천하대사를 맡았을 때 이를 능히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 전국 휘호대회 및 백일장.
▲ 전국 휘호대회 및 백일장.

□ 선비정신은

선비정신은 의리와 지조를 중요시하고, 인간으로서 흔들림 없는 신념을 지켜내는 것을 말한다.

대의를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는 불굴의 정신이 바로 선비정신이다. 선비정신은 시대적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대변되는 정신이다.

한때는 선비정신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그게 아니라 그 정신 때문에 조선조 500년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 영주시의 선비문화 계승·발전을 위한 노력

영주시는 한국의 대표적 정신문화인 선비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 2008년부터 2016년까지 이어진 영주시의 `선비문화축제`는 지역 활성화라는 목표 아래 지역의 창조적 개발 및 정체성 확립, 지역주민의 공동체 의식함양에 취지를 두고 매해 계속되고 있다. 또한 현대사회의 다변화한 구조 속에서 문화적, 정신적 정체성을 확립하자는 데도 그 뜻을 두고 있다.

영주 한국선비문화축제는 소수서원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을 배경으로 유교문화의 본향에서 선비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문화적 경쟁력을 갖춘 축제인 동시에,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장으로도 역할하고 있다. 영주시는 유·불문화가 공존하는 곳으로 천년고찰 부석사와 소수서원, 자연의 정취가 아름다운 무섬 전통마을, 선비의 숨결이 남아 있는 선비촌, 단종 복위에 연루됐던 금성대군 위리안치지 등이 자리한 고장이기도 하다.

 

▲ 매년 선비문화축제를 통해 공연되는 `실경 뮤지컬 정도전`
▲ 매년 선비문화축제를 통해 공연되는 `실경 뮤지컬 정도전`

□ 선비 배출의 보고 소수서원

소수서원은 국학의 제도를 본떠 선현의 제사를 모시고, 유생들을 교육한 장소로 풍기군수 주세붕이 유학자인 안향의 사묘를 설립한 후 1543년(중종 38) 유생교육을 위한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것이 시초다. 이후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補)를 추가 배향했다. 1550년 사액 현판을 하사받은 소수서원은 1868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존속했던 47개 서원 중 하나다.

소수서원이 사액을 받고 국가에서 인정한 사학으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지면서, 풍기지역 사림의 집결소이자 향촌의 중심기구로 그 위치를 굳혔다.

소수서원은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었으며, 보물 제59호 숙수사지당간지주, 국보 제111호 회헌영정 등 141종 563책의 장서가 남아 있다.

 

▲ 소수서원에 제향된 성리학의 대가 회헌 안향 선생 영정.
▲ 소수서원에 제향된 성리학의 대가 회헌 안향 선생 영정.

영주가 배출한 대표적 선비

정도전(1342~1398)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 개국의 중심에 있었던 정도전은 대표적 개혁사상가로 고려 말 국가적인 시련과 사회적인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대책으로 양인(良人)을 근간으로 하는 국가의 건설과 자주국가의 확립을 목표로 했다.

정도전은 한양 천도를 주도하고, 1395년 정총 등과 함께 고려국사를 수찬하고 경제문감을 저술해 임금에게 올리고 새 궁궐의 이름을 경북궁이라 짓고, 궁 내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정문, 융문루, 융무루 등의 이름 짓기도 했다.

안축(1287~1348)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시호는 문정(文貞), 할아버지는 희서, 아버지는 석(碩)이며 어머니는 안성기(安成器)의 딸이다. 경기체가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의 작가로, 죽계(지금의 풍기)에서 세력기반을 다지고 중앙에 진출한 신흥사대부의 한 사람이다. 1347년에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지고, 순흥 소수서원에 제향(祭享)됐다.

안보(1302~1357)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원지(員之). 시호는 문경(文敬), 아버지는 석(碩)이며, 형은 첨의찬성사 축(軸)이다.

1320년(충숙왕 7) 문과에 급제, 광주사록(廣州司錄)에 임명되고 1344년에 원나라의 제과(制科)에 합격해 요양행중서성조마 겸 승발가각고로 있다가 노모(老母)를 위해 귀국해 양광도 안렴사를 거쳐 이듬해 교주도 안렴사를 역임했다. 형인 축과 함께 안향(安珦)을 제향한 소수서원에 배향(配享)됐다.

박승임(1517~1586)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보(重甫), 호는 소고(嘯皐)다.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1540년 식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승문원, 예문관, 홍문관 등에서 청환직을 거쳤으며, 충언을 담은 1만 여 상소를 올리는 등 정책 결정에 적극 참여했던 인물이다. 박승임의 성리학적 견해는 이황의 학성을 따라서 주리론적 경향이 강했다. 저서로는 `성리유선`, `공문심법유취`, `강목심법`, `소고문집` 등이 있고 영주시 구산정사에 제향됐다.

김담(1416~1464)

조선 전기의 천문학자로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거원(巨源), 호는 무송헌(撫松軒),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1435년 정시에 병과로 급제하고 1439년에 집현전 박사가 됐다. 이순지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였던 김담은 세종 때 천문과 역법사업에 크게 공헌했다. 김담은 정인지, 정초, 정흠지, 이순지 등과 함께 `칠정산내편`, `칠정산내편정묘년교식가령`, `칠정산외편`, `칠정산외편정묘년교식가령`, `대통력일통궤`, `태양통궤`, `태음통궤`, `오성통궤`, `사여전도통`, `중수대명력`, `경오원력`, `선덕십년월오성릉범` 등 천문과 역법에 관한 많은 책들을 번역하고 펴냈다.

황준량(1517~1563)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로 현 영주시 풍기읍에서 태어났다.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1540년 식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557년 단양군수, 1560년 성주목사로 4년간 재임하다 1563년 병으로 낙향해 예천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황은 이를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제문을 두 번이나 쓰고 특별히 행장도 직접 썼다. 문집으로 `금계집`이 있으며 풍기의 우곡서원과 신령의 백학서원에 제향됐다.

/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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