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재휘<br /><br />논설위원
▲ 안재휘 논설위원

여러 명의 정치인들을 태운 버스가 절벽에서 굴러 한 농부의 밭에 떨어졌다. 생존자가 아무도 없었다. 사고현장을 처음 목격한 농부에게 기자가 물었다. “정말 생존자가 아무도 없었나요?” 농부가 대답했다. “처음엔 몇 명이 살아있다고 외치더군요.” 기자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안 구했나요?” 그러자 농부가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정치인들 말을 어떻게 믿어요? 다 뻥인데.”

시중에 나도는 정치유머의 하나다. 과장되고 끔찍하지만, 한편으로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식언(食言)을 잘하는지에 대한 극단적인 여론을 풍자하고 있다. 10년넘게 끌어온 영남권신공항 건설추진이 또다시 무산됐다. 영남권은 영락없이 닭 쫓던 개 지붕만 쳐다보는 개 신세가 됐다. `신공항` 신기루를 놓고 천지가 시끄럽도록 멱살잡고 다투다가 한순간에 모개로 헛물을 켠 무참한 꼴이 되고 말았다.

영남권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사이에 옛날 `신행정수도` 논란으로 나라를 들썩거리게 했던 세종시가 다시 정치이슈의 핵심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여당 소속인 남경필 경기지사가 “개헌을 해서라도 국회와 청와대를 세종시로 이전해야 한다”고 발언한 것이 시작이다. 세종시를 지역구로 둔 무소속 이해찬 의원도 최근 국회분원의 세종시 설치를 내용으로 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유권자들을 홀리기 위한 정치인들의 공약(空約) 습성은 억세고 드세다. 국민들 역시 정치인들이 마구발방 내던지는 수상한 약속에 손쉽게 휘둘린다. 이 같은 모순현상은 소아병적인 지역이기주의와 맞물려 한없이 증폭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내년 말로 예정된 대통령선거가 개헌 정국 기류에 뒤섞이면서 기상천외한 가설들이 공약(公約)이라는 이름으로 민심을 뒤흔들 개연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지난 4·13 총선에 출마한 지역구 후보자들이 내건 공약을 이행하는데 필요한 예산은 무려 1천조 원이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가 20대 총선 후보자들로부터 공약 예산표를 제출받아 분석한 결과다. `우선 당선되고 보자`는 심산으로 허황한 공약, 국가의 형편을 고려치 않은 선심성 정책약속들을 마구 쏟아내는 우리 정치판의 진짜 문제점은 그런 후보에 쉬이 놀아나는 유권자들에게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진실로 요긴한 것은 정치인들의 공약을 제대로 검증해내어 표심에 올바로 연결시킬 선진적 가치판단 구조다. 무엇보다도 빠르고 정확하고 강력한 공약검증 장치를 발전시켜야 한다. 나라 말아먹을 선심성 공약을 일삼는 후보자들을 가려내는 정밀한 시스템을 하루빨리 개발해야 한다. 몰염치한 정치인들이 거듭 당선되곤 하는 후진적 선거메커니즘을 확실하게 단절해내야 한다.

유권자들의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비꼰, 씁쓸한 우스갯소리가 있다. 너도 나도 “다리를 놓아주겠다”는 공약이 범람하던 시절, 강(江)도 없는 지역에서 같은 공약을 내놓은 후보에게 “강이 없는데 어디에다 다리를 놓느냐”고 묻자 “강을 만들어 다리를 놓으면 된다”라고 큰소리를 쳤다던가. 그런데 그렇게 황당한 공약을 내건 후보가 결국 당선됐다는 유머의 후렴은 더 배꼽을 잡게 한다. 국민들의 `공약(空約)` 불감증 증후군은 깊고도 깊다.

말도 안 되는 `달콤한 독`을 써서 당선된 정치인들의 무책임을 끝까지 징치할 수 있는 엄정한 정치시스템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일까. 달달한 유혹에 솔깃해 나라의 미래를 망치지 않도록 유권자의 의식을 새뜻하게 일깨워낼 묘책은 정녕 없는 것인가. 국민들은 망국적 `표(票)퓰리즘`에 마구 휘둘리고, 정치인은 공약이 물거품이 돼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대한민국을 이대로 둘 수는 정말 없는 노릇이다. 정치인들이 진심으로 존경받는 나라는 언제쯤이나 이룩될 것인가. 김해공항 증설을 한사코 `신공항 건설`이라고 욱대길 수밖에 없는 작금 청와대의 처지가 안쓰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