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 위에서
슬로베니아

한국은 거주하는 사람의 숫자가 5천100만 명에 이르는 인구밀집형 국가다. 반면 슬로베니아는 인구가 한국의 1/25 수준인 200만 명에 불과한 나라. 1990년대 초반 유고슬라비아연방에서 독립한 이 나라의 생소한 이름이 우리들에게 익숙해진 건 지극히 `문화예술적`이다.

2000년대 초반. `이상 현상`으로까지 불리던 파울로 코엘료 열풍. `연금술사` 이후 이어진 이 브라질 소설가에 관한 한국 독자들의 사랑은 작품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동반했다.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무대로 유명세
자동차도, 네온사인도 없이 조용하고 평온한 도시
거리 곳곳 용의 조형물과 분수대… 동화 속 같아

바로 그즈음 제목부터가 흥미를 끄는 코엘료의 소설이 번역·출간된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이 소설의 무대가 되는 공간이 바로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이야기하면 아래와 같다.

직장과 가족이 있고, 애인과 친구도 있는 평범한 여성 베로니카. 그러나 그녀는 생이 한없이 권태롭다. 어느 날 “슬로베니아의 위치가 어디인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는 온당치 못한 국제적인 무관심 아닌가”라는 황당한 이유의 유서를 쓰고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자살에 실패한 베로니카. 정신병원에서 의식을 되찾은 그녀는 정상과 비정상의 모호한 경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러던 중에 정신병자로 낙인찍힌 한 남자와 예상치 못한 사랑에 빠지는데….

▲ 여름축제를 즐기는 슬로베니아 사람들.
▲ 여름축제를 즐기는 슬로베니아 사람들.
이 소설은 슬로베니아와 류블랴나라는 명칭을 한국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후에는 이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란 동명의 영화가 에밀리 영 감독의 연출로 제작되기도 했다.

슬로베니아를 여행했던 계절은 여름이었다. 거기에 도착하기 전 일주일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머물렀다. 도시 한가운데 거대하게 서있는 슈테판성당과 오페라극장, 미적 완성도가 예술품에 가까운 국회의사당과 시청 건물, 그 옛날 황제와 여제(女帝)가 생활했다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전들. 비엔나의 건축물은 크기에서부터 보는 사람을 기죽인다.

규모와 인구면에서 보자면 세계 어디 도시에도 뒤지지 않는 서울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일까? 가져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열망 탓일까? 기자는 조그맣고, 조용한 도시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술 취한 관광객으로 불야성을 이루는 태국의 수도 방콕보다는 이웃나라 라오스의 한적한 수도 비엔티안이 좋았고, 아이스크림 하나 사먹으려 30분씩 줄을 서는 이탈리아 로마보단 적요하기까지 한 알바니아의 티라나가 좋았다.

비엔나에서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까지는 기차로 3시간 남짓. 멀지 않은 거리다. 그러나, 풍경과 사람들의 표정은 마치 다른 대륙으로 건너온 것처럼 달라졌다. 비엔나가 광역화된 거대 도시라면, 류블랴나는 시내 중심가를 조금만 벗어나도 커다란 나무 아래 꼬마숙녀가 그네를 타는 시골 풍경이다.

한 나라의 `수도`라고 하면 떠오르는 고정된 이미지가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시끌벅적함과 고층빌딩으로 높아가는 스카이라인, 탁한 공기와 수만 대의 자동차가 만들어내는 교통체증 등.

▲ 류블랴나 곳곳에선 조각된 용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류블랴나 곳곳에선 조각된 용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류블랴나는 인간의 인식 속에 자리한 수도의 이미지를 보기 좋게 뒤집는다. 빵빵거리는 자동차도, 스피커에서 중구난방 울려나오는 소음도, 붉고 푸른 휘황한 네온사인도 없다. 도시의 중심을 유유히 흐르는 강물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

거리 곳곳엔 용(龍)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들어서 있고, 더위를 식혀줄 예쁘고 아기자기한 분수들이 즐비해 어떻게 보면 동화 속 공간 같다. 당장이라도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공주와 용으로부터 공주를 구해낼 왕자가 나타날 것 같은 분위기다.

뜨거운 햇빛이 쏟아지는 류블랴나역 광장에서 여행자안내소를 찾았다. 푸른 눈동자의 아가씨 둘이 차가운 커피를 앞에 두고 오후의 심심함을 견디고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관광객이 반가웠던 것일까? 무료지도에 가격이 저렴하고 깨끗한 숙소를 동그라미 쳐 표시해주고는 가는 길까지 친절하게 일러준다. 둘 다 웃는 모습이 너무 예뻤다. 뚫어져라 지도를 보지 않아도 너끈히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조그맣고 잘 정돈된 도시. 그녀들이 손짓으로 일러준 길을 걸어 유스호스텔로 향했다.

헌데, 이것 봐라. 거리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 떠돌이 개나 길고양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커다란 나무그늘 아래 온통 정적에 빠진 류블랴나. 그 조용함이 여행자의 지친 발걸음을 편안하게 위로해줬다.

▲ 여름날 더위를 식혀주는 류블랴나의 분수들.
▲ 여름날 더위를 식혀주는 류블랴나의 분수들.
숙소에 도착할 무렵. 사람을 대신해 나를 반겨준 건 청동으로 조각했음직한 용이었다. 조그만 교량 입구에 버티고 선 그 녀석은 긴장감이나 공포감을 주기는커녕 반가움을 불렀다. 용의 등을 한 번 쓰다듬어주고 다리를 건넜다. 물줄기를 뿜어 올리는 분수조차도 숨을 죽인 듯 고요한 도시 류블랴나.

숙소로 정한 유스호스텔에도 손님이 많지 않았다. 정원에선 한국과 꼭 같이 고목에서 매미가 울어댔다. 정겨운 여름풍경이었다. 농밀한 어둠이 류블랴나를 온전히 뒤덮고 나서야 다시 거리로 나섰다. 불어오는 밤바람이 낮의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주황빛 등을 밝히고 손님을 기다리는 레스토랑과 카페들. 중세 이전부터 사람이 살아온 도시인지라 이끼 낀 건물 하나하나가 고풍스럽기 그지없다. 광장에선 아코디언 연주와 민속춤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가로등이 비치지 않는 어둑한 강변에선 연인들이 입을 맞추고.

적요과 정적이 지배하는 낮의 거리와 달리, 밤의 류블랴나는 `유럽풍 낭만`으로 가득했다. 열정에 들떠 키스를 하는 청춘들을 보고 있자니, “여기에서라면 나도 사랑에 빠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엔 늦어버린 마흔다섯 사내의 심장이 로맨틱하게 울렁였다.

선명하게 대비되는 낮과 밤. 드물게 찾아온 기자의 가슴 두근거림과 함께 류블랴나의 어둠이 짙어가고 있었다.

슬로베니아는…

공식 명칭은 슬로베니아공화국(Republic of Slovenia). 유럽 발칸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나라로 물빛 아름답기로 유명한 아드리아해 연안에 자리했다. 면적이 2만273㎢인 작은 나라로 한국의 1/11 크기다. 인구는 약 200만 명. 수도는 류블랴나(Ljubljana)다. 북쪽으로는 오스트리아, 동쪽으로는 헝가리, 서쪽으로는 이탈리아, 남쪽으로는 크로아티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슬로베니아인이 83.%로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며, 소수의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언어는 슬로베니아어. 가톨릭신자가 58%, 그 숫자는 적지만 이슬람교도(2.5%)와 정교도(2.3%)도 존재한다.

지중해성 기후를 나타내며, 동유럽 국가 중 경제적으로 부유한 편에 속한다. 1인당 국민소득은 약 2만3천 달러. 화폐는 유로화를 사용한다. 1유로는 현재 한국 돈으로 약 1천320원.

▲ 류블랴나 도심을 관통하며 흐르는 조그만 강.
▲ 류블랴나 도심을 관통하며 흐르는 조그만 강.
1918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과 함께 유고슬라비아왕국을 구성했다. 이후 1945년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의 일원이 됐다.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동유럽에 민주화의 물결이 일면서,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를 거쳐 1991년 6월 주권국으로 독립했다.

한국과는 1992년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이어 과학기술협력 협정, 문화협력 협정, 무역 및 경제협력 협정, 원자력안전협력 협정 등을 맺었다. 한국은 슬로베니아로 타이어와 자동차 등을 수출하고, 슬로베니아로부터 의약품과 발전기 등을 수입한다.

작지만 민족적 자존심과 긍지가 강한 나라로 사람들은 유쾌하고 친절하다. 수도 류블랴나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도시다. 특이한 건 용의 동상이 곳곳에 설치돼 있어 관광객들의 눈길을 끈다는 것. 아름다운 호수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는 블레드( Bled)와 해변도시 코퍼(Koper)도 여행자가 매력을 느낄만한 곳이다.

사진제공/서지은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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