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락<br /><br />경주청하요양병원장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행복도 거기에 비례할 것으로 착각한다(전도서. 6장1~3). 국민 소득이 8천400달러였던 1993년에는 52%가 행복하다, 42%는 그저 그렇다, 6%는 불행하다고 답했다. 20년이 지난 2011년 말 국민 소득이 3배인 2만3천달러일 때, 행복 여론 조사에서 52%는 행복하다, 40%는 그저 그렇다, 8%는 불행하다고 답했다. 이것으로 보면 국민의 행복감은 경제 성장과는 비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3배를 더 잘 살아도 행복 지수는 비슷하다.

또 2011년 월 소득이 500만원 이상인자는 57%가 행복하다고 했고, 200만~499만원 정도의 사람은 52%가 행복하다고 했다. 200만원 미만이 사람은 50%가 행복하다고 했다. 이로보아 돈의 많고 적음보다도, 내가 내 삶을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행복의 중요한 평가기준이 된다.

여론 조사 결과, 큰 부자라 하더라도 평범한 사람보다 행복을 느끼는 양은 조금 더 많을 뿐이었다. 빈곤의 문턱을 넘어가서 생계가 안정되면 재산이 늘어난다 해도 그것이 행복과는 직결되지 않는다는 결론이다. 생활 형편이 상류인 사람들 중에서도 43% 정도는 행복을 느끼지 않았다. 돈이 행복에 절대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돈에 중독되어 있지는 않을까를 걱정해야 한다. 돈에 중독되어 있는지 여부는 돈을 가지고 있다가, 빈털터리가 돼 봐야 알 수 있다. 마치 흡연자가 담배를 피우다가 끊어 보면, 중독 여부를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럼, 진정한 부자는 누구일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많이 가진 자가 부자이다. 이 세상에 제일 중요한 것은 햇빛, 참사랑, 우정, 이웃 도우기 등인데 이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면 약전 골목이나 먹자골목이 있듯이 `행복 골목`도 생겨서 터질 정도로 성업할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 점을 쳐 봐도 점쟁이에게 돈만 주는 것일 뿐이다.

부자란 사랑하는 사람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자를 말한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기를 매우 좋아한다. 이렇게 볼 때, 이태석 신부는 거대한 부자이다. 그 신부님이 부자가 아님을 증명할 수 있는 자가 있으면 우리를 설득해 보라. 불가능할 것이다.

사랑이란 돈으로는 살 수 없다. 사랑뿐 아니라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경치 등 대자연도 돈거래가 불가능하다. 이것들은 자기 이름으로 등기해 두지 않아도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미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으므로 그들 전부가 부자일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란 인간의 욕망을 중심으로 하여 돈이 으뜸가는 기준이 되어 형성된 사회를 말한다. 그것은 소비를 원동력으로 해서 사유재산을 증식하기 위해 경쟁하는 체제이다.

지금은 소비 경제 체제에 있지만 인간들은 현명하기 때문에 미래에는 `더불어`를 생각하는 삶을 선택해야만 좀 더 잘살아갈 수 있는 세상으로 바꿔 갈 것이다.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니고, 제도를 보강해 `함께 살아가자`고 주장해야 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노력이나 자선 형식으로는 효과가 거의 불가능하다. 국가 차원에서 행해야 비교적 고른 혜택이 가능하다. 국가의 이런 장치를 `복지제도`라고 한다.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체제에서는 자유로이 자기 소유를 많이 모을 수 있다. 그러나 자유는 남을 위해 절제돼야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 이제는 자본의 쏠림으로 크게 벌어진 빈부 격차를 좁혀야 한다. 그래서 교육은 공유정신을 가질 것을 가르쳐야 한다.

머릿속에 꽉 찬 돈에 대한 집착을 줄여야 나의 돈은 `남의 것을 잠시 가지고 있을 뿐이다`라는 공유의 정신이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

돈이 나의 친구나 하인이 되면 돈은 충직한 종이 된다. 그러나 돈이 나의 주인이 되면 돈은 무자비한 독재자가 된다. 돈을 친구 정도로 사귀는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