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 위에서
베트남 ②

▲ 배 위에서 색채 선명하고 향기 좋은 과일을 판매하는 베트남 여인.
▲ 배 위에서 색채 선명하고 향기 좋은 과일을 판매하는 베트남 여인.

누구나 한 번쯤은 읽었을 중국의 고전 <삼국지>. 거기 등장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칠금맹획(七擒孟獲)의 고사(故事)다.

이는 `맹획이란 장수를 일곱 번 사로잡다`쯤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 에피소드를 요약하면 이렇다. 촉나라 승상 제갈공명이 `남쪽 오랑캐`(남만·南蠻)`를 정벌한다는 이유로 지금의 베트남 일대를 침략한다. 당시 남만의 지배자는 맹획. 무시무시한 완력과 배짱으로 이름 높았던 장수다. 제갈공명의 군대에게 일곱 번 사로잡혀 일곱 번의 고초를 겪었음에도 맹획은 “항복하겠다”란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통해 중국은 제갈공명의 아량과 상대를 압도하는 전략을 보여주고 싶었겠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자. 불리한 전쟁에서 생포된 장수가 일곱 번을 다시 목숨 걸어 싸우고, 또 싸우는 게 쉬운 일인가?

맹획은 굴복을 모르는 자존심덩어리였다. 바로 그런 베트남의 기질이 초강대국 미국과 프랑스의 군대를 자기 땅에서 몰아낼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이었을 것이다.

현지 젊은이들 배려로 찾은
작고 소박한 게스트하우스
친절하고 저렴해 감동

이름난 관광지에선
10배 넘는 바가지 상혼
독립의 자존심과 상반 `씁쓸`

나트랑을 출발한 베트남 종단열차는 힘겹게 달렸다. 지친 철마가 숨을 고르며 멈춘 곳은 후에(Hue). 불과 7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수도였던 곳이다. 새벽 2시. 도시 전체가 깊은 잠에 빠져 사위가 캄캄절벽이었다. 가로등도 없고, 달빛도 졸고 있다. 왕조의 화려한 중심지였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숙소부터 구해야했다. 기자가 알고 있던 후에의 숙소 이름은 딱 하나였다. `민꽝 게스트하우스`. 하지만, 늦은 밤에 처음으로 도착한 도시인지라 도무지 찾을 자신이 없었다. 그때, 기차에 동승했던 청년 서너 명이 다가와 묻는다. “도와줄까요?”

그들은 20대 초반의 베트남 젊은이들. 고교 동창 야유회를 떠났다가 기자와 같은 기차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숙소를 쉽게 찾았다. 고마움에 맥주라도 한 병씩 마시라며 5달러짜리 지폐를 내밀었지만 결국엔 받지 않았다. 여행자에게 베푼 친절을 몇 푼의 돈으로 계산 받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민꽝 게스트하우스는 가족이 운영하는 작고 소박한 숙소. 꽃나무 흐드러진 정원에 앉아 마시는 달콤한 커피가 좋았다. 베트남 커피에선 초콜릿 향기가 났다.

 

▲ 한국에서 봐온 것보다 크기가 작지만 달콤한 맛이 일품인 베트남 바나나.
▲ 한국에서 봐온 것보다 크기가 작지만 달콤한 맛이 일품인 베트남 바나나.

사람 좋아 보이는 주인 아주머니와 10대 후반의 아들은 커피는 물론, 바나나와 파인애플 등을 무시로 가져다줬다. 로비에 앉기만 하면 그것들을 내왔다. 과일을 즐겨 먹는 편이 아니지만 성의가 고마웠다.

후에를 떠나던 날. 예상한 금액보다 적은 숙박료를 받겠다고 해서 한 번 더 놀랐다. “사흘을 묵었는데, 왜 이틀치만 계산한 건가요”라고 물었다. 아주머니를 대신해 아들이 답했다. “첫날은 새벽에 왔잖아요, 그건 계산에 포함 안 시켰어요.”

대신 커피와 과일값을 지불하겠다는 기자와 “그건 모든 손님에게 무료로 드리는 것이니 따로 돈을 받을 수 없다”는 주인 모자와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제갈공명과 맹획의 피 튀기는 싸움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유쾌한 다툼이었다.

위의 두 가지 추억은 후에를 즐거운 기억으로 남게 했다. 그러나, 스트레스와 짜증을 불렀던 사건도 없지 않았다.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는 법이니까.

 

▲ 조개와 채소에 매콤한 양념을 넣어 찐 베트남 요리.
▲ 조개와 채소에 매콤한 양념을 넣어 찐 베트남 요리.

자금성을 본떠 만들었다는 후에의 왕궁을 구경 갔던 날이다. 왕이 머물던 시절에는 왕과 처첩, 측근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는 내밀한 구역이 이채로웠다. 사라진 왕조의 궁전은 쓸쓸한 감상을 불렀다. 흥망과 성쇠, 그리고 부침.

여행자에겐 좋을 게 없는 우울한 잡념을 떨치려 궁전 안에서 코끼리를 탔다. 차광막 드리운 거대한 짐승의 등에 올라 왕이 살았던 공간을 여유롭게 어슬렁거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문제는 코끼리에서 내려 마른 목을 축이려 들렀던 노천카페에서 일어났다.

후에의 특산품 중 하나인 `후다 맥주(Fuda beer)`는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술 중 하나다. 구멍가게에선 30센트(360원)에 구입할 수 있다. 그런데 3달러(3600원)를 내란다. 어쩔 수 있나. 낼 수밖에. 유명 관광지에서 흔히 접하는 바가지 상혼이라 생각키로 했다.

그런데, 옆 테이블에 앉은 유럽 여성에게는 똑같은 맥주를 7천200원 받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기가 뭣해서 조용히 주인을 불러 물었다. “맥주 한 병에 7200원이라니 너무 비싼 것 아닌가?” 돌아온 대답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너희들은 부자 나라에서 왔잖아. 그리고 저 여자에게 얼마를 받든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인데.”

 

▲ 시원한 `하노이 맥주`는 여행자의 피로를 씻어준다.
▲ 시원한 `하노이 맥주`는 여행자의 피로를 씻어준다.

짜증이 솟았다. 그 가게를 나와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근데, 이건 또 뭔가? 커피를 가져다주며 3달러를 선불하란다. 베트남 커피 한 잔의 평균 가격은 30센트에 불과하다. 그곳에선 맥주도 커피도 10배의 폭리를 취하고 있었던 것.

불볕더위에 화까지 내면 불쾌지수만 높아질 터였다. 커피를 마시는 둥 마는 둥 자리를 떴다. 갑작스레 피곤이 몰려왔고, 숙소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궁전 밖으로 나오니 베트남 전통 교통수단인 시클로(자전거 택시)가 줄을 지어 서있다.

무더위에 땀 흘리며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마음으로 의자에 앉으며 요금을 물었다. 그런데…. 30달러란다. 왕궁에서 민꽝 게스트하우스까지는 1km가 채 안 된다. 그럼에도 3만6천원을 달라고 하는 거다. 연이은 바가지였다. 시클로 타기를 포기하고 터벅터벅 걸어 숙소를 향하는 길. 생각이 복잡해졌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폭탄요금 바가지를 씌운다는 일부 택시기사에 관한 언론보도가 떠올랐고, 일본인에겐 한국인보다 높은 가격을 받는다고 당당히 말하는 서울 명동의 노점상 인터뷰도 기억났다. 남을 통해 우리의 맨얼굴을 돌아보는 마음은 참담했다.

베트남은 자존심으로 독립에 이른 나라다. 일곱 번 사로잡히면서도 항복을 입에 담지 않았던 맹획의 자존심, 해방의 원했던 국민들의 힘을 모아낸 호치민의 자존심, 마주선 총구 앞에서도 당당했던 열일곱 소녀 `보 티 사우`의 자존심이 세운 나라가 베트남인데….

돈 앞에 자존심을 버리고, 여행자를 상처 입히는 일부 베트남 장사꾼을 도대체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걸까? `민족적 자존심`과 `바가지 상혼`의 불안한 동거. 어울리는 않는 이 두 단어는 그 나라를 떠나는 날까지 기자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 베트남 관광지엔 인형 등의 기념품을 판매하는 가게가 흔하다.
▲ 베트남 관광지엔 인형 등의 기념품을 판매하는 가게가 흔하다.
베트남 기차여행을 위한 TIP

사이공에서 하노이까지 해안선을 따라 철로가 이어지는 베트남은 기차로 여행하기 좋은 환경을 갖췄다.

한국의 기차보다 속도가 느리고, 정시 출발과 도착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낭만`을 찾는 배낭여행자들에겐 인기다.

보다 즐거운 베트남 기차여행을 위해 아래 사항을 미리 알아두면 좋을 듯하다.

▲ 기차표는 직접 구입하자

주요 관광지마다 수없이 많은 여행사 간판이 걸려있는 베트남. 여행사는 비행기 티켓은 물론, 버스표와 기차표 구입을 대행해준다.

하지만, 달랑 기차표 한 장 대신 사주고 터무니없는 커미션을 요구하는 곳도 없지 않다.

티켓 가격 절반의 수수료를 요구하는 업체를 본 적도 있다. 그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기차표는 직접 역에 가서 예매하는 것이 좋다.

베트남 역무원 대부분은 영어를 할 줄 안다. 기본적인 회화만 가능하다면 기차표 사는 걸 굳이 남에게 맡길 이유가 없다.

 

▲ 줄지어 달리는 수많은 오토바이는 이제 베트남의 활력을 상징하는 장면이 됐다.
▲ 줄지어 달리는 수많은 오토바이는 이제 베트남의 활력을 상징하는 장면이 됐다.

▲ 식당칸을 적극 이용하자

베트남을 여행하는 관광객들의 상당수는 기차의 침대칸을 이용한다.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의 이동거리가 길어 하룻밤을 기차 안에서 보내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낮에는 침대칸에 멍하니 누워있을 필요가 없다. 식당칸으로 옮겨 창밖으로 펼쳐지는 동양화 같은 풍경을 감상하며, 시원한 음료수나 맥주를 마시는 건 기차여행이 주는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독특한 향신료가 들어간 베트남식 볶음밥에 따끈한 국물을 곁들여 점심을 해결하는 것도 색다른 재미를 준다.

▲ 현지인·여행자와 말동무가 돼보자

짧게는 6~7시간, 길게는 30시간 넘게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말벗이 간절해진다.

그때는 부끄러워하지 말고 함께 탑승한 현지인이나 관광객에게 먼저 말을 걸어보자. 거기서 의외의 친구를 얻을 수도 있다. 웃으며 건네는 인사에 화를 낼 사람은 없다. 과자나 과일 등 군것질거리를 슬쩍 나눠주는 것도 짧은 시간에 친해질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영어와 베트남어를 잘 하지 못하면 또 어떤가.

미소와 보디랭귀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친해질 수 있는 게 여행자들이다.

사진제공/류태규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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