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 위에서
캄보디아 ③

▲ 앙코르 유적지에서 만난 캄보디아의 어린 스님.

한국이라면 아직 쌀쌀함이 남아있을 3월 초순. 캄보디아의 한낮 기온은 섭씨 40도를 오르내린다.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숨이 턱턱 막혀오는 날씨.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가 많지 않은 나라지만, 흙길 역시 햇볕에 달궈져 프라이팬처럼 뜨겁다. 포장된 대낮의 아스팔트길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맨살이 닿으면 화상을 입는다.


크메르어로 웅얼거리는 주문같은 축원
“신의 은혜로 행복 누리길”… 경건함 느껴

그 길 위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맨발로 걷는 캄보디아의 어린 스님들. 소승불교 전통의 캄보디아에선 시주를 청하러 다니는 수도승들이 많다. 인접국이며 비슷한 종교양식을 지닌 라오스의 `새벽 탁발`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고, 외국인이 시주에 참여하기도 한다. 라오스 서북부에 자리한 조용한 마을 루앙프라방의 탁발은 이젠 일종의 관광상품이다.

1개월 가량 캄보디아를 여행했던 몇 해 전. 수도인 프놈펜과 앙코르와트가 위치한 시엠립, 원시의 해변풍경이 펼쳐지는 시아누크빌 등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지치면 뜨겁게 이글대는 태양을 피해 카페나 식당의 차광막 아래서 과일주스를 마시곤 했다. 눈앞에서 거리를 오가는 적지 않은 숫자의 동승들.

오렌지빛 선명한 승복을 입고,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총총히 길을 재촉하는 어린 스님들.

누군가가 자신 앞에 나타나 무릎을 꿇고 시주를 건네면 들릴 듯 말듯 작은 목소리로 축복의 말을 전했다.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으면, 정확하게 표현하긴 힘들지만 발원지를 알 수 없는 경견함이 전해져왔다.

무릎 꿇는 걸 비굴한 행위라 생각해왔던 기자가 그들 앞에 꿇어 앉아 머리를 숙인 게 언제가 처음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유는 단순했다. 많아야 열서너 살로 밖에 보이지 않는 동승들의 피곤한 발걸음을 잠시 쉬게 하고, 음료수나 과일 혹은, 빵을 그네들에게 전하기 위해서였다. 어린 스님의 고단한 발길을 멈추게 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 시엠립 앙코르 사원을 거닐며 만난 풍경들. 사람들은 그 속에서 평화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는 행복한 경험을 하게 된다.<br /><br />
▲ 시엠립 앙코르 사원을 거닐며 만난 풍경들. 사람들은 그 속에서 평화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는 행복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랬다. 시작은 캄보디아 동승을 향한 연민이었다. 그러나, 그들 앞에 무릎 꿇는 게 거듭될수록 기이한 마음상태에 이르게 됐다. 주스 병이나 바나나를 가방에 넣어주면, 동승의 축원이 머리 숙인 기자 앞에서 진행됐다. 단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크메르어. 그 주문 같은 웅얼거림에 마음이 한없이 편해졌다.

그 편안함을 얻으려고 어떤 날은 각기 다른 수도승 앞에서 10번 넘게 고개 숙여 무릎을 꺾었다.

그들이 읊조리는 말의 내용이 “신의 은혜가 당신에게 전해져 건강과 행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라는 건 한참이 지난 후 영어를 할 줄 아는 캄보디아인을 통해 들었다.

펄펄 끓는 아스팔트나 지저분한 흙길에 꿇어앉아 목덜미로 굵은 땀을 흘리면서도 마음으로 와닿는 그 평화로운 느낌이 좋았다.

지금 짐작해보면 그 편안함의 이유는 아마도 불교에서 말하는 하심(下心)을 어렴풋이나마 체험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스스로를 낮추고 상대를 떠받드는 행위.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는 단순한 행동이 사람의 마음상태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게 아직도 잘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날 평화로웠던 마음의 상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잠시 캄보디아와는 천리만리 떨어진 먼 공간 남아메리카 이야기를 해보자. 1967년. 볼리비아에서 체 게바라가 체포된다. `20세기 최고의 혁명가`를 산 채로 붙잡았지만, 볼리비아 정부군은 쇠사슬에 묶인 게바라를 앞에 두고 벌벌 떨었다.

20대에 쿠바 혁명을 주도하고, 30대 초반 나이에 미국의 백악관과 소련의 크렘린 앞에서도 기죽는 법이 없었던 불요불굴의 사나이 체 게바라. 그의 당당함과 유명세에 기가 질린 탓이었다.

모두가 `혁명의 사령관`을 심문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미국 CIA로부터 특수훈련을 받은 볼리비아 장교 하나가 겨우 나서 몇 가지를 묻고 답을 들었다. 그 장교는 개인적 호기심을 더해 이런 질문을 덧붙였다고 한다.

“당신도 신을 믿는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명료하게 게바라가 답했다.

“아니. 나는 인간을 믿는다.”

기자가 신의 존재에 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 건 다소간의 드라마틱한 과장이 섞였을 수도 있는 이 일화의 영향이 컸다. 소설가 김용만은 일흔을 넘긴 나이임에도 종교와 신의 곁에 가기 거부했던 이유를 “내게는 문학이라는 또 다른 종교(신)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기자는?

신이라는 절대자, 절대자를 신뢰하는 종교에 기대려면 `인간은 약한 존재`라는 깨달음이 먼저 와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아도 주체적으로 삶을 이끌 수 있는 인간`으로 스스로를 과대평가 또는, 과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 착각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다. 종교를 가질 생각이 현재까지는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신을 믿는 사람을 마음속으로부터 경원하던 태도는 달라졌다. 이는 캄보디아 어린 스님들에게서 받은 감흥과 감동 때문이다. 무작정 떠난 배낭여행에서 마흔여섯 `무신론자`가 세상을 달리 보는 또 하나의 시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캄보디아 여행에서 돌아온 지 수 년이 흘렀다. `집이 아닌 길 위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배웠을까`를 가끔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신과 신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절대자와 종교에 관해 열린 시각을 가지려 하는 태도변화. 이건 여행을 통해 얻어낸 작지 않은 선물이다. 외롭고, 자신의 힘만으론 이겨내기 힘든 고통에 직면했을 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는 것.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신을 믿는다는 게 아직까진 기자와 무관한 일이다. 그러나, 그 이성적 결심과는 별개로 캄보디아 동승 앞에서 잠시잠깐 맛봤던 `설명하기 힘든` 평화로움이 자꾸 그리워진다. 이게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한계일까.

앙코르와트, 보석보다 빛나는 돌의 나라

아이들은 일 년 내내
맨발로 크메르의 역사를 밟고 다닌다
자야바르만과 수르야바르만을
발음하지 않더라도 빛나는 땅
강위력한 왕조는
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신왕(神王)을 만들고
백만 마리 코끼리와 천만 신민의 믿음
돌을 쪼아 보석으로 빛나게 했다
앙코르와트, 지구 위 가장 아름다운 석조물
누가 있다면 나서봐라, 이 말을 부정할 자
밥을 굶는 가난과
이백만 명을 학살한 이데올로기로도
궤멸시키지 못한 지난 세기의 광영
해자 너머로 떨어지는 태양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건너가는 다리를 비추고
압사라 여신의 도드라진 가슴
천 년 세월에 깎이고도 고혹 잃지 않았다

프놈 바켕과 앙코르 톰 그늘마다 들어찬 목소리
슬픔과 환희, 눈물과 웃음은 대극이 아님을
깨달은 자는 사원에서 진실을 읽고 간다
갈라진 돌 틈마다 들어찬 간절한 사연들
누구는 세상 무너지는 통곡을
다른 누구는 가장 빛나는 고백을
왕과 신의 거처에 남기고 돌아갔다
인종과 나이를 뛰어넘은 장엄이
서쪽 하늘 아래 석양으로 붉게 타오를 때
캄보디아가, 아니 아시아가, 아니 전 세계가
동시에 고개를 조아리는 숨가쁜 풍경
크메르의 역사는 이미 몰락을 넘어섰다
고통과 피 흘림 속에서 마침내 완성된 신성
바닥을 구르는 자갈 하나까지 해탈에 이른 땅

눈부신 일출이 사원 꼭대기에 걸릴 때
현재와 미래가 어쩌지 못할 과거는 존재를 드러내고
이끼마저 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월
신성한 호수에 몸을 씻는 코끼리의 울음소리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다는 건 행일까, 불행일까
영과 욕, 부침을 말없이 지켜봤을 거대한 나무들만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건기의 하늘을 지키고 섰다
끝나지 않을 부연으로도 해명되지 못할 비밀과 감탄
캄보디아 시엠립 정글 속 크메르의 사원들

앙코르와트,
인류가 끝끝내 가닿지 못할 멀고 먼 피안의 나라.

* 위 시는 캄보디아 시엠립의 앙코르와트가 선사한 감동을 운문 형식으로 표현해본 것이다.

사진제공/구창웅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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