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3월에 종영한 드라마 `시그널`을 지난 주말 동안 몰아서 다 봤다. 정규 방영 때 시청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일주일 내내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혔을 것이다. 이재한 형사(조진웅)의 대사 몇 개가 기억에 남는다. “죄를 지었으면 돈이 많건 빽이 있건 죗값을 받게 해야죠. 그게 우리 경찰이 해야 될 일이지 않습니까?”라고 묻는 장면과 “며칠 전만 해도 살아 있는 사람이었는데, 날 위로해주고, 웃어주고, 착하고, 그냥 열심히 살던 사람이었는데! 그 미친놈 똑같이 죽여 버릴 겁니다” 라며 포효하는 대목에서 `죗값`과 `똑같이`라는 단어에 생각이 한참 머문다.

집값, 밥값, 생활물가, 등록금… 모든 게 다 비싼데 죗값만 턱없이 싸다. 강남역 노래방 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일면식도 없는 20대 여성을 흉기로 무참히 살해한 사건으로 세상이 뒤숭숭하다. 경찰은 이 살인범이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고 발표했다. 재판에서 정신분열이나 심신미약에 의한 살인이 인정될 경우 선고 형량이 가벼워질 것이다. 어버이날에 두 자녀가 아버지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며칠 전에는 부산에서 50대 남성이, 인천 주택가에서 고교생이 아무에게나 흉기를 휘둘렀다. 양심의 가책 같은 건 작동하지 않는다. 그냥 사람 죽이는 게 무섭지 않은 것이다. 죗값이 싸니까.

술 먹고 심신미약상태에서 사람 죽였다고 10년, 정신분열증으로 사람 죽였다고 7년, 초범이고 뉘우친다고 5년, 미성년자라고 3년,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무혐의, 돈 있고 빽 있어서 집행유예…. 이게 죗값인가? 죄는 큰데 그 값은 너무 적다. 제대로 된 죗값은 도대체 누가 치르나? 결국 선량한 사람들이 다 뒤집어쓴다. 싼값에 용서를 얻은 이들은 출소해서 또 사람을 죽인다. 재범이 아니더라도, 잠재적 범죄자들은 `10년 살고 나오면 그만`이라고, `재워주고 밥 먹여주는 감옥 생활도 할 만하다`고 생각할 것 아닌가? 이들이 다 치르지 않은, 또 치르지 않을 죗값 때문에 아무 잘못 없는 20대 여성이, 어린 여자아이들이, 우리의 가족과 이웃이 살해당하고 성폭행 당하고 칼에 찔리고 벽돌로 머리를 강타 당한다.

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 `부서진 사월`은 알바니아 고원 지대에 아직도 남아 있는 관습법 `카눈`을 소재로 하고 있다. 소설의 자세한 내용을 소개하는 대신 `카눈` 이야기를 짧게 해보려고 한다. `피는 피로써 값을 치른다.` 이는 카눈 26항 125조의 내용이다. 누군가 살해되어 피를 흘리면, 그 가족은 `피의 복수`라는 명분을 얻게 된다. 가해자 또는 그 집안 남자를 살해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죽고 죽이는 끝없는 보복으로 이어진다.

이 야만적 관습법이 다시 부활한 배경에 눈길이 간다. 1990년에 공산정권이 붕괴된 후 들어선 정부의 부패가 문제였다. 부패한 정부와 공권력을 사람들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사법체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자 15세기의 관습법인 카눈을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필리핀에서 두테르테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온갖 마약과 매춘, 납치, 살인 등 강력범죄를 다스리지 못하는 기존 사법체계에 환멸을 느낀 국민들이 `흉악범을 모두 죽일 것`이라며 사형제 부활을 공언한 두테르테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오늘날 법이 아무리 체계화되었다고 해도 법이 닿지 못하는 사각이 분명 존재한다. 법이 어루만지지 못하는 슬픔이 넘쳐난다. 법이 위로는 커녕 2차 가해를 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 사법체계가 알바니아나 필리핀처럼 부패하고 무능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죗값이 비싸야 법도 권위가 생긴다. 법이 삼엄하게 느껴져야 한다. 도무지 죄 지을 생각이 들지 않아야 한다.

“내 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고, “그놈은 내가 반드시 죽인다”고 한 `개구리 소년` 아버지의 형형한 음성이 아직도 가슴을 날카롭게 찌른다. “내가 용서 안 했는데 누가 용서를 해?”라던 영화 `밀양` 속 전도연의 절규도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