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재휘 논설위원
▲ 안재휘 논설위원

인식이나 사물은 정반합(正反合)의 3단계를 거쳐서 전개된다는 것이 철학자 헤겔이 확장시킨 변증법이론이다. 정(正)은 그 자신 속에 모순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단계이며, 반(反)은 그 모순이 자각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단계이다. 이 같은 모순에 부딪침으로써 제3의 합(合) 단계로 전개해 나간다는 이론이 곧 변증법이다. 요즘 정치권을 들여다보노라면 반(反)의 단계 깊숙한 곳에 다다른 느낌이다.

정치권 기류가 끝 모를 혼란 속으로 몰려가고 있다. 새누리당은 친박계가 선거패배의 책임을 거부한 채 정진석 새 원내대표의 개혁 설계도를 뒤집어엎은 친위쿠데타로 엉망이 됐다. 더불어민주당은 은인자중하는 모습을 이어가던 손학규 전 상임고문이 정계개편을 시사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뒤숭숭해졌다. 임기를 마무리하는 정의화 의장은 오는 10월경 신당 창당가능성을 언급해 갖가지 풍설의 진원지를 자처했다.

19대 국회가 문을 닫기 직전 박근혜 대통령에게 마지막 선물로 안긴 `상시 청문회법`이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국회를 통과한 `상시 청문회법`은 국회 상임위원회가 중요 안건의 심사와 현안 조사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청문회를 개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여소야대 구도의 20대 국회에서는 새누리당이 반대를 하더라도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만 손을 잡으면 언제든 청문회 개최가 가능해진다.

관심의 초점은 과연 박 대통령이 이 법에 대해서 거부권을 행사할 것인가에 쏠려 있다. `상시 청문회법`은 박 대통령에게 안과 밖이 따로 없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존재로 떠올랐다. 받아들이자니 연중 내내 행정부가 입법부에 시달리기 십상이고, 거부하자니 여소야대 구조의 정치지형을 헤쳐 나갈 방도가 없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국회가 이 장치를 선용(善用)할 가망이 있어 보이지 않는 것이다.

행정부의 우려는 일리가 있다. 장·차관을 비롯한 고위 공무원들을 무차별적으로 부르는 현재 국회의 관행상 통제 없는 권력행사로 이어질 개연성이 있다. 임기 말 공직사회의 `레임덕`현상과 맞물려 행정부 공무원들에게 좋지 않은 신호를 보내 공직사회의 복지부동을 부채질하면서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이 떨어질 염려도 무시하기 어렵다. 입법취지와 달리 정치적 공세의 장으로 변질될 가능성도 높은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이 지금 이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은 바른 선택이 아니다. 행정부가 국회의 나쁜 관행을 직접적으로 끊어낼 수 있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있지 않다. 국회의 으뜸기능이 행정부 감시에 있는 한, 국회가 행정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는 충분히 보장돼야 한다. 이번 기회에 국회가 성숙한 감시기능을 자율적으로 배양할 수 있도록 공을 던져주는 것이 맞다. 청문회 구태에 대한 감시는 이제 국민에 맡길 때가 됐다.

어쨌거나 정치권에는 서서히, 내년 말 대통령선거를 종착지로 놓고 복잡한 이합집산(離合集散) 와류가 형성되고 있다. 유력한 대권주자조차 없는 집권당 새누리당의 사분오열이 위태롭다. 4·13총선 참패에 대한 패인분석조차도 하지 않고 있는 새누리당은 끝내 반성도 개혁도 생략할 모양이다. 친박계는 비박계가 스스로 몰살을 감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난 총선에서 집권여당이 패배했다는 해괴한 판단을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 정치권은 이제 친박이니 비박이니, 친노니 비노니 하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패 가름에서 놓여나야 한다. 국민의 삶을 위한 논쟁이라곤 완전히 배제된 그들의 추잡한 밥그릇다툼을 겨눈 민심의 분노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너른 가슴으로 이념을 확대재생산하지 못하는 정치세력에는 미래가 없다. 그것이 4·13 총선의 교훈이요, 헤겔의 변증법 3단계인 합(合)이 부르는 오늘날의 시대정신이다. 바야흐로 치열한 `스펙트럼 전쟁`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