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천년의 비밀 경주 고분을 찾아서
⑤ 천마(天馬)와 황금… 신라를 읽는 2개의 키워드

▲ 금관과 천마도장니 등이 발굴된 천마총

동서양을 불문하고 고대의 전설과 신화에는 말(馬)이 자주 등장한다. 현존하며 세간을 떠도는 옛이야기들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마케도니아 출신의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애마 부케팔로스, `삼국지`의 명장 관우를 태우고 하루에 400km를 달렸다는 적토마, `서초패왕`으로 불리던 항우와 삶은 물론, 죽음의 순간까지 함께 한 오추마 등은 역사와 전설 안에 존재하는 명마(名馬)다.

천마도장니·금관 등 1만1천여점 `우르르`
신분과시용 금장신구·말 관련 유물이 대다수
20대 자비왕이나 22대 지증왕 유택 추정
돌무지덧널무덤 구조 눈앞서 살펴볼 수 있어

고대왕국 신라의 왕과 귀족들 역시 전쟁 수행과 신속한 이동에 도움을 주는 말을 소중하게 여겼다. 경주시 황남동에 자리한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는 이를 증명한다.

1973년. 박정희 정부는 대릉원 인근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고분 발굴작업을 진행한다. 애초 계획은 황남대총에 대한 발굴조사를 거쳐 이를 국민들에게 공개하는 것. 하지만, 당시 한국의 유적 발굴기술로는 큰 규모의 고분을 조사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택한 것이 155호 고분으로 불리던 천마총에 대한 발굴조사.

발굴결과는 놀라웠다. 앞서 언급한 천마도장니와 금관을 필두로 1만1천 점이 넘는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중 말과 관련된 유물은 총 504점. 그중에서 사람들의 큰 관심을 받은 것은 단연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장니(障泥)였다.

말의 배를 가려 진흙이 튀는 것을 방지하는 동시에 장식의 용도로도 사용된 천마총 출토 장니는 신라 고대미술의 우수성을 짐작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자작나무 껍질을 누벼 만든 1600여 년 전 화폭에 뿔 달린 말이 하늘을 날아가는 모습을 그려놓은 신라 사람들.

경주학연구원 박임관 원장은 이에 대해 “한국에서 자생하지는 않았지만, 신라의 고위층들은 말을 기르고 탄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의 자동차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 당시의 말”이라는 설명을 들려줬다.

“비단 천마도장니만이 아닌 말의 뼈와 마갑(馬甲·말에게 입힌 갑옷), 각종 마구(馬具·말을 탈 때 사용하는 기구)가 함께 출토된 것을 볼 때 말은 신라 귀족들이 귀하게 생각했던 동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역시 박 원장의 견해.

천마도장니는 그 역사적·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 207호로 지정됐다.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된 이 유물은 신라시대에 그려진 그림 중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작품이기도 한 까닭에 역사학계는 물론, 미술계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보여 왔다.

고고학자 조유전의 책 `발굴 이야기`에는 천마총 발굴에 얽힌 흥미로운 후일담이 등장한다.

 

▲ 천마총 출토 유물 중 하나인 섬세하고 화려한 금제 허리띠
▲ 천마총 출토 유물 중 하나인 섬세하고 화려한 금제 허리띠

`경주에 가뭄이 지속되자, 왕릉을 파헤치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떠돌아 민심이 흉흉했다. 금관이 출토된 날.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조사단의 머리 위로 빗방울이 쏟아졌다. 이어 천둥과 번개도 몰려왔다. 겁을 먹은 조사단이 금관을 급히 수습해 상자에 옮겨놓자 거짓말처럼 하늘이 밝아지고 비가 그쳤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땅 속에 있던 신라 왕의 넋이 노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 천마총은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인의 손으로 금관을 발굴한 최초의 고분이기도 하다. 거기서 출토된 금관의 두께는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시대 금관 가운데 가장 두껍다. 금의 성분 또한 우수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런 이유로 정부는 천마총 출토 금관을 국보 188호로 지정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금은 고대에도 귀한 광물로 대접받았다. 신라의 지배층들 역시 금으로 된 장신구를 신분 과시 등의 수단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관과 함께 천마총에서 발견된 금제 허리띠(국보 190호)와 순금 관모(국보 189호), 화려한 금귀고리 등은 이런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으로 만든 관모
▲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으로 만든 관모

그렇다면 천마총에는 누가 묻혀있었을까? 이는 연구자에 따라 견해가 엇갈린다. 22대 지증왕의 능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출토된 유물의 전체적인 성격이 국가의 비약을 드러내고 있으며, 칠기 화염문(火炎文·불꽃무늬) 등이 중국 북위의 영향을 받은 6세기 초의 작품으로 보인다”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반면 천문학 지식을 동원해 해마다 달라지는 해돋이 방향을 근거로 “천마총은 20대 자비왕의 유택”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강석경의 책 `능으로 가는 길`에는 이와 관련된 좀 더 상세한 이야기가 나와 있으니 참고해도 좋을 것 같다.

천마도가 그려진 장니를 얹은 말 위에 앉아 순금으로 만든 왕관이나 관모를 쓴 왕과 귀족, 커다란 금귀고리로 화려하고 예쁘게 꾸민 왕비 혹은, 후궁들이 신라의 월성을 유유자적 오가는 장면을 떠올리는 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끝 간 데 없이 자극한다.

천마총은 이러한 사람들의 상상 속 궁금증을 일부나마 해소시켜주고자 발굴된 고분의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하지만, 걱정거리도 없지 않다. 천년 이상 외부로 드러나지 않았던 고분의 속살을 대중에게 보여줌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훼손의 위험성은 없을까?

 

▲ 하늘을 나는 말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천마도장니.
▲ 하늘을 나는 말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천마도장니.

기자의 이런 우려를 불식해준 사람은 박임관 원장이었다. “공개가 결정된 다음부터 훼손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고민했기에 큰 위험은 없다. 내부로 스며드는 습기를 막아야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데 이는 제습시설 확충 등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 다만 장마나 폭우를 대비한 침수 방지책은 보다 치밀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 천마총에서 출토된 왕관.
▲ 천마총에서 출토된 왕관.

천마총에는 동쪽으로 머리를 향한 채 금관을 쓰고 조용하고 깊은 잠에 빠져있던 고분 주인의 유해도 재현돼 있다. 발굴 당시의 모습 그대로다. 박 원장에게 물었다. “일반인들이 신라 고분의 내부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게 천마총이다. 재현과 복원이 잘 된 부분과 미흡한 부분으로 나눠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은 답이 돌아왔다. “경주 고분의 고유한 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를 바로 눈앞에서 살펴볼 수 있다는 점과 출토 상태가 양호한 여러 가지 유물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천마총의 매력이다.” 이에 덧붙여 박 원장은 “돌무지와 돌무지를 덮은 찰흙과 봉토의 두께 등을 실제 발굴 시 확인된 정보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고 말했다.

천마총을 찾아간 날. 대릉원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셨다. 그 봄볕을 받으며 서너 살 꼬마들이 병아리처럼 종종거렸다. 세월이 흐른 후, 그 아이들 또한 `천마와 황금의 나라`로 천년왕국 신라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 금관총 위에 뿌리를 내리고 거대하게 자라난 나무. 흐르는 역사는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을까.
▲ 금관총 위에 뿌리를 내리고 거대하게 자라난 나무. 흐르는 역사는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을까.
우연한 발견, 그러나 빛나는 보물 `금관총`

일제강점기 빼앗길 위기 처한 유물
경주시민들 십시일반 모아 지켜내

1921년 일제강점기. 그해 경주에서는 한국인의 근성을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난다. 일반주택을 보수하다 우연하게 발견하게 된 금관총에서 출토된 유물을 조선총독부가 보관하려 하자, “그 방식은 옳지 않다”며 들고 일어선 경주시민들이 돈을 모아 유물전시관을 축조했고, 그것을 국운이 기울어가던 나라에 기꺼이 기증한 것.

경주시 노서동의 금관총은 `한반도 식민지배의 정당성과 근거`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 일본의 `고적 조사사업` 와중에 예기치 않게 찾게된 고분 중 하나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역사서 `일본 사기` 에 기록된 “경주는 일본에게 예를 바치며 항복한 나라”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고심했다.

1920년대 일본이 주도한 경주 고분의 발굴역사는 `발굴`이라기보다는 `도굴`과 `유물 빼돌리기`에 가까웠다. 이는 아시아는 물론, 유럽의 제국주의국가가 식민지에서 행한 문화적 착취의 전형적인 형태였다.

하지만, 일본의 의도와 달리 금관총의 발굴 조사작업은 경주 고분에 대한 당대 시민들의 인식을 바꿔놓았다.

비록 일본이 주도한 것이었지만, 발굴과정에서 우리 역사상 최초로 출토된 미려한 금관은 “한국은 한때 이처럼 빛나는 문화유산을 만들어냈던 민족”이라는 자긍심을 가져다줬고 이는 무장독립운동과는 또 다른 형태의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

 

▲ 천마총 내부엔 발굴 당시의 고분 속 유해가 재현돼 있다.
▲ 천마총 내부엔 발굴 당시의 고분 속 유해가 재현돼 있다.

경주학연구원에 따르면 인류사를 통틀어 비교적 온전한 형태의 금관이 발굴된 것은 겨우 10여 건에 불과하다.

영국의 저명한 고고학자 레나드 울리(Leonard Woolley)가 찾아낸 수메르 왕릉의 금관, 아프가니스탄 테베 고분의 금관을 제외하면 나머지 금관은 모두 한반도에서 발굴됐다. 현재까지 출토된 신라시대 금관은 모두 7점. 이만하면 `황금의 나라 신라`라는 별호가 어색하지 않다.

금관이 나왔다고 해서 얻게 된 이름이 금관총이지만 이 고분에선 금관 외에도 순금귀고리, 금제 팔찌와 반지, 모양을 달리하며 빛나는 구슬, 금제 신발, 칼과 갑옷, 화살촉, 말방울, 말띠 장식, 각종 토기와 칠기 등 수만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출토된 금의 양만도 7.5kg. 예술적 가치를 차치한 금 가격만으로도 3억6천만 원에 달한다.

비록 입을 가지지 못한 무덤이지만, 금관총은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는 듯하다. “수난 속에서도 지속되는 것이 역사다. 그러니, 역사의 엄정함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사진제공 구창웅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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