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희룡<br /><br />서예가
▲ 강희룡 서예가

예술은 하나의 기술, 즉 어떤 사물을 만드는 기술이고 이 기술은 규칙에 대한 지식과 그 규칙을 적용시킬 수 있는 능력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한 규칙들을 알고 이용하는 법을 아는 사람만이 예술가인 것이다. 예술을 이렇게 파악하는 데는 독특한 전제가 있다. 즉 자연은 완전하며 인간은 행위함에 있어 스스로 자연과 비슷하게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은 법칙의 지배를 받으므로 예술가는 자연의 법칙을 발견해서 거기에 따라야 하며 자유를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유는 예술가가 자신의 행위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에서부터 쉽게 비껴나기 때문이다. 미가 주관적으로 해석되었을 때는 이미 그 위대성을 상실한 것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미의 주관주의적 원리를 받아들이면서도 객관적 보편적 요소들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예술 장르 중 사진을 예술의 범주에 넣느냐 마느냐는 아직까지 논란의 중심에 있다. 사진가의 작업은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 사회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상호 교감하고 주석을 붙일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다. 사진을 제작하는 모든 과정은 인생을 깊이 있고 풍부하게 그리고 더 다양하고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서다. 사진은 아주 짧은 순간을 정지시켜 표현하는 예술행위이다. 감동을 일으키도록 찍은 사진세상의 모든 대상이 사진이라는 기계적 복제로 예술의 이름으로 발표된다면 이것은 가장 저급한 예술이 될 것이다. 사진은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 보다는 시대의 정신과 삶을 정제된 이미지 형태로 보여주어야 한다.

약대를 졸업한 약사 출신의 어느 노 사진가의 금강송 사진전이 지난 4월 11일부터 15일 동안 서울예술의전당에서 열렸다. 강원도 평창 반경 50㎞ 내에 있는 설악산과 오대산 등 해발 500m 이상 산에서 찍은 소나무 작품 60여 점이 전시되었다.

문제는 이 작가가 2011년부터 2년 동안 경북 울진의 입산이 금지된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에서 세 차례에 걸쳐 무단 입산하여 수령 200년이 훨씬 넘은 금강송을 포함해 나무 수십 그루를 임의로 벤 혐의로 2014년 법원의 선고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사진가가 본인 맘에 드는 금강송 한 그루를 찍기 위해 사진구도 설정에 방해가 된다고 주변의 수 백 년 된 다른 금강송을 비롯해 수십여 그루의 나무들을 마구 톱질하여 잘라버린 것이다. 이런 엽기적인 사건이 뒤늦게서야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작가 사진속의 금강송도 두 개의 가지가 맘에 안 든다고 잘려나간 상태로 찍혀 전시되었다. 그 잘려진 두 개의 가지가 원래 어떤 자연형태이었는지는 톱질한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곳에서 한 사진가의 일그러진 예술적 논리와 세속적 탐욕에 의해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고작 사진 몇 장을 찍기 위해서 안타깝게도 수 백 년 동안 풍상을 견뎌온 노송들과 주변의 나무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잘려졌을 것이라고는 감히 아무도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50년간 300여 점을 찍었다 한다. 이 긴 세월동안 찍은 사진 속에 있는 금강송 주변의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훼손되었는지는 그 일행들만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금강송 사진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것은 2012년 5월 프랑스 파리 시청 국제미술관 전시를 통해서였다. 경상북도와 울진군은 그런 사정도 모르고 그가 프랑스까지 가서 금강송 파리사진전까지 열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문화체육관광부장관까지 참석해 격려사를 하기도 했다고 하니 아무리 몰랐다 하나 그 모양이 참 우습게 되었다.

작품대상은 예술적인 시각에서의 자연적인 미로 그것이 하나의 예술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사진가라면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돈이나 명예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면 애초에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 이런 일탈행위는 결국 이미지로 포장된 추악함이 인간 내면세계를 감싸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천하의 완전한 예술은 `자연`그대로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