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살았던 우리의 노래 문경아리랑
⑩ 음치시인의 문경새재 여행

▲ 오가기 편하도록 평평하게 잘 다져진 새재길

모든 시인들이 노래를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음치에 박치, 몸치인 시인도 적지 않다. `음치시인`에게 노래는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의 입을 통해서 들려오는 것. 그러나, 여전히 세상은 시인을 “노래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또한 많은 수의 독자들은 시를 노래와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생생한 과거와 마주한 듯한 사극드라마 촬영장
길 곳곳 자리한 시비와 아리랑비도 만나
왜군에 황망히 길 터준 신립장군 전설도 들으며
외국인들에게도 사랑받는 걷기 좋은 새재길 만끽

문경새재 입구에서 1관문까지 셔틀을 이용했다. 버스가 출발하며 운전수가 운영규칙이라도 되는 듯 작은 라디오의 버튼을 누르자, 반가운 노래가 흘러나왔다. `문경새재 아리랑`이다. 취재를 통해 알게 된 이야기들과, 발굴과 보존에 힘썼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까지의 일을 한마디로 압축해보라면 노래에는 기억이 담겼다는 것이다. 겪은 일에 관한 기억이 아니라, 가볼 수 없는 시간과 장소에 얽힌 기억이다.

문경새재 1관문 뒤에 마련된 사극드라마 촬영장은 옛 조선을 상상하도록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촬영장의 한옥 건물들 사이사이를 누비며 그간 책상 앞에서는 느끼지 못한 생생한 과거와 마주한 듯했다.

소박한 양반가택의 모퉁이를 돌자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리기에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마당 한켠에 둥글게 모여 앉은 할머니 한 무리가 보였다. 봄나들이 삼아 문경새재에 왔다는 점촌 할머니들이었다. 대문 안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민 것밖에는 없는데 집에서 싸온 찐 옥수수며 고구마, 파전에 삶은 계란까지 내주며 반갑게 맞아준다.

아시는 아리랑 한 곡 청해 들을 수 있는지 여쭙자 옆에 앉은 푸른 스웨터 차림의 할머니께서 곧장 노래를 불러주셨다. 곡조야 달랐지만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가네” 하는 익숙한 노랫말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문경새재 와서 들은 노래를 흉내낸 거라고 한다.

자식들은 모두 외지로 나가고 할머니는 집을 점촌으로 옮겼다. 김기현 교수에 따르면 점촌은 전래되어온 민요가 있으나 문경새재아리랑이라 우리가 부르는 민요가 전해지지는 않았다. 행정구역상 다른 곳이다가 문경시와 묶이게 되면서 문경새재아리랑 행사의 한 주체가 되었다. 없던 노래라도 우리가 부르면 그것이 곧 우리 노래라는 말이 떠오른다. 정선처럼 이동이 적었던 곳의 노래는 옛 모양을 유지하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노래가 변형되기 마련이라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할머니가 잠깐 들려준 노래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 문경새재 오픈세트장 마당 한켠에 모여 앉은 점촌 할머니들
▲ 문경새재 오픈세트장 마당 한켠에 모여 앉은 점촌 할머니들

□ 할머니에게 듣는 문경새재의 전설

할머니께서 감주를 한 잔 따라주며 문경새재에 얽힌 전설을 아느냐고 하셨다.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신립 장군은 아느냐고 하신다. 장군 이름은 안다고 말씀드렸더니 할머니는 거침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린 신립이 사냥 중에 처녀가 홀로 사는 새재의 한 촌가에 묵었는데, 처녀의 식구는 인근의 괴수에게 모두 잡아먹히고 처녀 혼자 죽을 위험에 처했다. 객의 도움으로 무사히 밤을 넘긴 처녀는 목숨을 의탁하고 데려가주길 청하였으나 신립은 매정하게 곁을 떠난다. 처녀는 원망하며 집을 불사르고 스스로 불타 죽는다. 훗날 장군이 새재에 주둔해 있을 때, 하늘로부터 탄금대로 철수하라는 처녀의 말이 들렸다고 한다. 그것이 장군이 후퇴한 이유라는 것이다.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의 주인공은 그 처녀의 원혼이었다는 이야기다.

 

▲ 교귀정. 조선시대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계인수하던 곳으로 1470년경 건립됐고, 1896년 의병전쟁 때 화재로 소실됐다가 이후 1999년 복원했다.
▲ 교귀정. 조선시대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계인수하던 곳으로 1470년경 건립됐고, 1896년 의병전쟁 때 화재로 소실됐다가 이후 1999년 복원했다.

임진왜란 때, 새재 넘기가 두려운 적군을 앞에 두고 신립 장군이 황망하게 길을 내준 사실은 미스터리로 유명하다. 문경새재에 얽힌 이 전설은, 한양을 버린 임금의 이야기와 닮았다. 왜군이 새재길을 넘고 탄금대에서 신립장군이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임금은 한양을 버린다. 문경새재를 넘은 것부터가 선조에게는 덜컥할 일이었다.

비극으로 따지면 조선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이어진다. 왕은 자신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음을 느끼고 백성을 버린다. 왜군은 쉽게 함락한 한양에서 배를 불리고 목을 축일 생각이었으나, 도성에는 약탈할 것이 별로 없었다. 개성으로 피난한 왕의 궁궐에 백성이 불을 질렀기 때문이다. 도성에서 득을 보지 못한 왜군은 한양 인근을 약탈한다. 왜군에 쫓겨 수백리 길을 걸어온 이들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전쟁이 이들에게 고통인 것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적들이 처들어오면 약탈과 살육을 당하리라는 것이 당연해 보이는 마당에, 혈육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맡길 조정이 기별도 없이 사라졌다. 백성은 불을 지른다. 자기들처럼 힘이 없으면 약탈당하고 죽임당할 운명임을 알고 있었다 해도, 나라가 먼저 자기를 버렸다는 사실이란 이렇듯 용납하기 힘든 것이다.

처녀의 전설을 생각하며 새재를 오를수록, 백성을 내친 영웅이 어떻게 저주받는지 상상한 옛사람들의 마음이 애잔하게 느껴진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전설을 입에 담았을까?

2관문을 지나서 도적떼와 여행객이 번갈아 쉬어갔다는 마당바위를 지나치다보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 왜란 이후에도 이 길을 오가던 온갖 인생들이 있었다. 산적도, 산적을 만난 이들도 나무를 할 때는 같은 노래를 불렀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불렀을 노래의 의미며 정서를 상상하기가 힘들다. 신세가 험하기로 치면 따라잡을 수 없는 작부가 탄광촌으로 들어가 불렀을 법한 아리랑의 노랫말은 귀에 익겠지만 직접 듣는 기분이 어떨지도 짐작하기 어렵다.

이리도 감히 엿듣기 힘든 노래의 역사를 어떻게 복원할 수 있을까? 옛 사람의 삶에 밀착된 노래를 찾아듣겠다고 할 때,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제 대답을 해야 할 때이건만, 새재의 마지막 관문으로 향하면서도 질문은 끊이지 않았다. 바닥이 환히 보이는 도랑과 봄볕에 자꾸만 밝아지는 흙길은 곱기만 해서, 걸으며 상상한 피가 튀는 역사가 민망해질 지경이다.

 

▲ 문경새재 2관문과 3관문 사이에서 만난 미국인 가족들
▲ 문경새재 2관문과 3관문 사이에서 만난 미국인 가족들

□ 문경새재를 찾은 미국인 관광객 “판타스틱!”

6.5㎞ 정도라는 길은 너무나 평평해서 산길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이 느낌은 당연한 것인가보다. 적어도 2관문과 3관문 사이에서 만난 미국인 가족을 만나 알게 된 바로는 그렇다. 갓난아이를 태운 유모차 두 대를 끌고 네 살, 여섯 살의 두 아이는 걸려서 3관문까지 갔다가 내려오는 길이라고 했다.

아이들은 개구진 웃음을 한가득 머금고 반갑게 인사했다. 문경새재를 걸어온 소감을 물었다. 그는 1초의 고민도 없이 “판타스틱!”이라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그러면서 산길을 이렇게 편하게 오르내릴 수 있는 곳은 세계적으로도 드물 것이라 했다. 유모차를 끌고 3관문까지 가는 데 전혀 문제가 없는 잘 다져진 넓은 흙길이다.

교귀정에서 만난 서울 부부의 얘기도 같았다. 한 달에 한 번꼴로 문경새재를 찾는다는 부부는 “걷기엔 문경새재만한 곳이 없다”고 했다. `맨발로 걷기 대회`가 열릴만한 곳이다.

길의 가장자리로 시비들이 갑자기 등장한다. 비석마다 멈춰서 시를 읽었다. 선비였을 이들의 마음 풍경이 다채롭다. 아우에게 바치는 이별의 노래부터 새재의 웅장함과 아름다운 경관에 사로잡힌 노래까지, 이들은 이들대로 무심한 길섶에 자기들의 이야기를 남겼다.

3관문에 거의 다다라서는 트로트 한 자락이 들린다. “오빠가 간다/이 오빠가 간다. 내 나이를 묻지 마라/난 영원한 오빠야/사랑은 해도해도 나는 항상 뜨거워...” 등산복 차림에 건장한 남자가 부르는 노래다. 모자엔 선글라스를 얹은 채 아내인 듯 보이는 사람과 함께 이 기분 좋은 길을 걸으며 그는 송대관의 `오빠가 간다`를 부른다.

 

▲ 문경새재 오픈세트장 길목에 모여 있는 외국인 관광객들
▲ 문경새재 오픈세트장 길목에 모여 있는 외국인 관광객들

동네 산책길에서라면 빤한 취향으로 보였을 그 노래가 어쩐지 반갑다. 우리가 저마다 가장 익숙한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다는 운명을 보여주고자, 중년의 남자는 저 앞에서 “오빠가 간다”며 노래하는 듯하다. 새삼 뒤를 돌아보니 아이들은 “뽀롱뽀롱 뽀로로” 합창을 하며, 젊은이들은 이어폰을 꽂은 채 각자의 취향을 저격한 노래를 듣는다.

이 당연한 시대의 변화 속에서 변치 않는 노래를 찾고 또 남기고자 하는 마음의 정체를 밝히라고 한다면, 상실감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길의 관광객이지 호환과 약탈이 두려운 피란민이 아니다. 누군가 고통 속에서 걸었던 길을, 지금 우리는 관광중이다. 이 길을 춤추며 지났다던 왜군보다도 어쩌면 우리가 조상들로부터 더 멀리 있다고 해도 되리라.

드디어 3관문을 지나치기 전, 아리랑비 앞에 섰다. 눈은 아리랑비에 가 있건만, 마음은 얼마 전 SNS에서 본 농담이 차지한다.

터키의 문화재 실레 칼리스를 보수한 사진이 농담거리로 인터넷에 떠돈 적이 있다. 숱한 세월 동안 거의 부서진 탑은 보름 동안 삭아버린 연탄재나 다름없는 모양이었다. 터키 정부는 그 탑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 지나치게 매끈하게 보수된 새 건축물을 닮은 `스폰지밥` 캐릭터가 고 성터의 별명이 되었다. 이 결과를 사람들은 비판적으로 본다. 그런데 터키 문화재 사진 아래 누군가 남긴 댓글이 인상 깊다. “어차피 이것도 세월이 지나면 다 같아지는 것 아니에요?”

먼 훗날 이 땅에 와서 길을 걸을 사람들이 우리의 후손일지 아닐지 모르겠다. 그들이 유전적으로는 우리와 가깝다고 해도, 문화적으로도 같은 종족이라 믿을 필요가 과연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는 옛 시대와는 다르다. 훗날의 사람들이 우리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 문경새재 길목에 있던 이언적의 시비
▲ 문경새재 길목에 있던 이언적의 시비

□ 사람들 모두에겐 저마다의 노래가 있다

고작 반나절을 걸어 만난 아리랑비 앞에서 반세기 이후에 이 돌이 어떤 의미일지 상상하며 땀을 닦았다. 한 시대가 이 길의 아리랑을 기억한 방식을, 후세의 사람들이 좋게 생각해주기를 우선 바란다. 비석 옆에 놓인 앙증맞은 단추함도 오래 살아남기를 바란다. 인형의 집처럼 생긴 단추함 안에는 꽃밭이 그려져 있다. 한복 차림의 여인이 그 안에서 한창 꽃놀이를 하는 중이다. 사람들이 인형의 집처럼 보이는 단추함으로 와서 한 번씩 단추를 눌러본다. 단추를 누르면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올라가는 사람이 재미삼아 빨간 버튼을 눌러보고, 내려오던 이가 궁금해서 파란 단추를 눌러본다. 각각의 단추를 누를 때마다 송옥자 씨와 송영철 옹의 노래가 번갈아 길에 퍼진다.

이 장난으로 노래는 기억될 것이다. 완전히 다른 맥락이 되었지만, 또 다른 곳에 가서 전혀 새로운 분위기의 다른 노래가 되어 불릴 것이다. 비록 노래를 할 줄 모르지만, 그래서 아리랑 한 소절도 어디 가서 제대로 부르지 못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문경새재를 거쳐 가다 들어본 이 노래에 어떤 사연이 담겼는지 기억할 것이다. 우리들에겐 저마다 불러야 할 노래가 있기 때문이다. 강남진 기자/이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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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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