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살았던 우리의 노래 문경아리랑
⑨ `민요전승론` 학자와 만나다

▲ 문경시가 주최한 `아리랑 일만수 이운식(移運式)`에 참석한 관계자들.

“영천아리랑을 영천 사람이 모른다. 영천아리랑은 애초에 북한의 용천아리랑이었다. 적어도 1922년의 자료에서 확인한 바는 그렇다. `용천`을 잘못해서 영천이라 적은 것이다.”

김기현 교수의 말은 초반부터 충격적이었다. `남들이 몰라서 그러는데 사실은 이러하다`는 식으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닌지라 사실관계를 확인해야 하는데, 우리가 이런 사실관계를 밝힐 때는 학술적으로 책임질 만한 전공자를 찾아야 한다. `민요전승론`이 전공인 김기현 교수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정부 지원을 받아 1986년에서부터 1983년 사이에 밀양아리랑 조사를 했다. 박춘석 씨의 아버지 박남춘이라는 분이 밀양에서 기방을 했는데 기생을 시켜 레코드로 곡을 만들어냈다. 밀양 말로 부른 것이 아니라 서울·경기 지역에서 불리던 `양산도` 가락이었다. 근본이 기생의 노래니 특수계층의 노래가 된다. 이를 근거로 밀양아리랑은 경기민요라고 했더니 크게 혼이 났다. 중요한 것은 이제는 밀양 분들이 부르니까 밀양 노래가 되었다는 것이다.”

밀양아리랑은 없었으나 이제는 있다는 말을 기자가 과연 이해하는지 김 교수는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한편으로
생활밀착형 노래가 특별장르로 정착
전승의 주체 따라 다양하게 변용돼

□변사와 관객, 나무꾼과 기생

문경아리랑이 학자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물었다.

“아리랑은 지역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불렀던 민요였다. 그러한 노래가 오늘날에 와서 특별한 하나의 장르로 탈바꿈한 것이다. 밭 매고 모내기할 때 부르던 생활 밀착형의 노래가 나운규의 영화가 히트하면서 특별한 노래양식이 되어버렸다. 예컨대 정선아라리에서 아라리는 어떤 의미가 있는 말이라기보다는 노래임을 알려주는 말이다.

후렴이 있는 노래를 일컫는 `알아리`가 지금의 아리랑이 된 것이다. 그에 상대되는 개념으로는 맨아리가 있다. 맨아리는 후렴이 없는 맨노래라는 뜻이다. 나운규 이전에는 아리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다만 각 지방마다 전승되던 민요가 있을 뿐이었다. 1930년대에 오면서 민요에 아리랑이라는 후렴이 붙은 곡이 많이 만들어진다. 영화 아리랑의 영향이다.”

그의 대답은 간단명료하다. 영화 한 편이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들어놓았다는 말이 믿기 힘들었다.

“1927년과 1928년에 걸쳐 영화 `아리랑`을 본 사람이 70만 명이 넘는다. 모르는 이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한다. 1930년대 들어가면 아리랑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 나운규가 영화주제곡으로 만들어 넣은 아리랑은 기녀 집단에 의해 다듬어진 것이다. 일본식 곡조인데 반조로 돼 있어서 슬프다. 변사가 나와서 노래하고 설명도 했는데 이것이 인기를 얻으며 음반으로 만들어졌다. 이 노래를 또 기녀 출신의 가수가 부르고 히트를 친다. 그래서 더욱 알려지게 된 것이다.”

김 교수는 문경아리랑의 기원설에 대한 생각도 상세히 밝혔다.

“1894년도에 헐버트가 듣고 채보한 노래도 기생들이 부른 노래다. 문경아리랑을 주목하는 이유는 1870년대부터 경복궁을 짓는데 일꾼들이 다 서울로 올라갔다. 경상도 사람들은 전부 문경새재를 지나갔다. 7년에 걸친 경복궁 공사의 고통을 잊기 위해 자기 고향 노래를 부른다. 각 지방의 아리랑이라고 하는 노래들이 오늘날 서울에 모여든 것이다. 그런데 그 노래를 기생과 소리꾼들이 부르게 된다. 전문적으로 노래를 불러 먹고 사는 사람들이 그 노래를 마구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오늘날 경기아리랑이고 긴아리랑이다.”

노랫말이 문경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당시의 사람들이 알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서울 사람들이 그것을 알 수 없다. 그런 노래를 부르니까 기생들이 그걸 퍼뜨리는 것이고 나중에는 헐버트가 들은 것이다.”

결론은 헐버트의 아리랑이 우리나라 아리랑의 원류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인상적인 것은 따로 있다. 아리랑을 변형시킨 변사와 관객과 일꾼과 소리꾼, 그리고 기생의 존재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후손에게 장차 전하게 될 것이 무엇인지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유네스코가 주목한 것은 사람이 아닌 `종목`

전승이란 변사와 관객처럼 마주한 관계를 통해서도 이루어지지만, 일꾼과 기생처럼 마주할 일이 없는 이들이 섞이는 일이다. 우리가 문경아리랑의 원형이라 불렀던 송영철 옹의 이야기가 김 교수의 이야기 속에서는 여러 전승주체 가운데 하나로 다루어진다.

“변형된 아리랑이 아닌 고형의 아리랑이 아직까지 불리고 있는 것이 바로 지금의 정선아리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변형되지 않고 남아있는 아리랑이라고 해서 그 아리랑이 모든 아리랑의 원류라고 지칭해서는 안 된다.”

▲ 문경새재 제2관문 일대 풍경.
▲ 문경새재 제2관문 일대 풍경.
김 교수는 태백산맥에 걸쳐서 불린 민요들을 상상해보라고 했다.

“옛날에는 인접 지역으로도 이동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고립된 지역은 고유성과 독자성이 있을 수 있지만 모심기 노래 같은 경우는 다 똑같이 부른다. 그 민요가 정선에는 아직 남아 있는 것이고, 다른 지역은 나름대로 변형되어 전승된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노래 중에 고형의 아리랑이 정선에 남아 있었을 뿐이지 거기서부터 퍼져나갔다고 할 수 없다. 그 고형의 아라리가 슬프고 애잔하고 청승맞으니 부르는 것이다. 송영철 옹이 나무할 때 아리랑을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송 옹의 노래는 투박했다. 우리가 그것을 문경아리랑의 특색이라 여길 때, 피치 못할 오해가 있다. 그 질박함은 문경의 것이 아니라 일꾼의 것이다. 전승 주체가 다양함에 따라 들리는 특색인 것이다.

“유네스코가 사람을 등록한 것이 아니라 종목을 유산으로 등재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 교수의 조언이다. 종목을 유산으로 삼았다는 것은 어떤 지역이나 계층, 전문가가 점유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이 노래, 아리랑을 얼마나 소유하려고 노력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다음으로 문경아리랑의 장르적 변용 가능성에 대해 물었다. 우리 시대의 전승 주체는 나무꾼도 기생도 아닌 다양한 장르의 생산자라고 여겨져서다.

“변용과 과장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사실을 확대해서도 안 된다. 자부심은 좋지만 확대·과장해서는 양질의 콘텐츠로 승화할 수 없다. 확대·과장된 아리랑이 언뜻 보기엔 그럴듯해 보이지만 오히려 아리랑의 가치를 스스로 깎는 일이다. 아리랑의 가치는 그것의 활용과 변화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유네스코 등재 거치며 왜곡현상 커져
철저한 기준 정해 전수 실태조사 해야
진실에 기초한 콘텐츠 개발이 중요

□찾을 수 없는 `뿌리`를 찾아서

김기현 교수는 아리랑 전문연구자로서 누구보다 아리랑이 널리 불리기를 소망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날 다시 아리랑이 주목받게 된 것이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리랑을 오해하고 왜곡하는 이들 때문이다. 김 교수의 말에 따르면,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일을 계기로 아리랑을 왜곡하는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아리랑 일만수 사업은 `아리랑`에 의미를 싣기보다는 `서예`라는 것에 더 의미를 둬야 한다. 노래 `아리랑`을 시각예술 아리랑으로 장르변환 한 것이다. 꼭 서예가 아니어도 좋다. 그림으로, 소설로, 영화로 얼마든지 변용될 수 있다. 아리랑은 천의 얼굴로 바뀔 수 있다. 그 중에 `서예`라는 하나의 얼굴로 바꿔본 것이다. 아주 큰 사업이었다. 사업비도 만만치 않고 500일이 넘는 시간과 공력이 투여됐다. 도록을 만들어 해외 한국어학과가 있는 127개 대학과 문화원에 보내기도 했다. 문경시의 아리랑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없었던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은 틀리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아리랑은 `유네스코 사건`을 거치며 또 변화할 것이다. 이 노래를 부르게 될 사람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다. 아리랑은 기생과 나무꾼처럼 운명이 서로 다른 이들을 한 데 묶는 특유의 역동성으로 기념적인 종목이 되었다. 후손에 전하려면 이 종목이 건강해야 한다. 문경아리랑의 연구에 뛰어드는 후학들에게 조언을 부탁드렸다.

“문경 지역의 아리랑을 다시 조사해야 한다. 문경아리랑의 뿌리를 어디서 찾겠는가. 당연히 찾을 수 없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무대에서 공연되는 노래만으로는 문경아리랑 전체를 알 수 없다. 공연 시간은 정해져 있고 곡의 다양성 면에서도 한정적이다. 반복해서 부르고 듣지 않으면 잊어버리는 것이 민요의 특성이다. 철저한 기준을 정해서 전승 실태조사를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상주아리랑은 1950년대 기생 김소희가 부른 신조아리랑이다. 지금에 와서야 상주아리랑이 된 것이다. 김소희는 전라도 광주 사람이고 육자배기 풍으로 아리랑을 불렀다. 사설에도 상주에 관련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학자는 어떤 문화건 진실이 줄고 거짓이 범람하면 생명력이 짧아진다는 점을 숙고해야 한다. 사람들이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에 기초해야 하는 학자로서 후학들에게 대중의 이런 성질을 강조하고 싶다.”

 

▲ 경북대 김기현 교수
▲ 경북대 김기현 교수

부화뇌동하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진실의 여부를 가장 잘 파악하는 것 또한 대중이다. 대중문화의 본질 중 하나는 사실인지 아닌지가 빨리 간파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문경새재를 배경으로 드라마나 소설을 쓰고자 하는 창작자들에 대해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새로운 문화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일은 중요하다. 그런데 콘텐츠의 기반을 과거에서 찾지 말고 현재에서 찾길 바란다. 특히 구전되는 민요의 경우는 옛날에서 찾으면 거짓말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제가 문경아리랑에 대해 더 이상 논문을 쓰지 않는 이유는, 더 이상의 `사실`을 만나지 못해서다. 사실을 만나지 못하면 거짓을 쓰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경 아리랑이 소설이나 영화화 된다고 해도 문경아리랑이 지닌 지금의 가치면 된다. 민요의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좋은 민요인가? 변형의 과정을 포함해 지역민들에게 사랑받는 문경아리랑은 그 자체만으로도 장르 변용되기에 충분하다. 1960년대에 탄생한 노래는 좋고 요즘 K팝은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노래는 골동품이 아니다. 많으면 좋고, 오래되면 좋고, 원류면 좋은 게 아니다. 그런 잘못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런 의식들이 과장과 왜곡을 낳는다.”

강남진 기자/이소연 시인

    이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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