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 위에서 이란 ①

▲ 이란 국경에서 가까운 터키의 시골마을 도우베야짓의 이삭파샤 궁전.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 이란 국경에서 가까운 터키의 시골마을 도우베야짓의 이삭파샤 궁전.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차도르와 모스크의 나라 이란으로의 여행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1개월짜리 여행비자를 얻기 위해서 인접국 터키의 세 도시를 숨 가쁘게 오갔다. 지금 생각해보니 왜 그처럼 이란 여행을 열망했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9·11 뉴욕-워싱턴 테러`가 일어났다. 미국은 테러의 진원지를 발본색원하겠다며, 배후로 지목된 이라크를 공격했다. 기자와 작가들이 여럿 모인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1개월짜리 여행비자 얻으려
100여개 항목 신청서 써내
가까스로 이란 도착하니
영어 한마디도 통하지 않아

“적지 않은 기자들이 이라크로 가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바그다드를 취재하겠다고 자원한다는데, 당신들은 그들이 이해되는가? 나는 이해가 안 된다. 총알에는 눈이 안 달렸다. 기자들을 피해 총알이 날아다닐 리가 없다. 미군의 폭격에 일흔 노인과 일곱 살 아이도 죽어가고 있는데… 정말 대단한 용기들이다.”

▲ 이란과 터키의 국경에서 만난 거대한 설산.
▲ 이란과 터키의 국경에서 만난 거대한 설산.
사실 기자는 용기 있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그랬음에도 이라크 바로 옆에 위치한 나라이자, 당시엔 국제사회로부터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불량국가`로 찍혀 있던 이란에 왜 가려고 했을까? 아마도 일생 한 번도 가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미지의 공간에 대한 막연한 동경 때문이었다고 짐작해보지만, 그것 또한 정확한 이유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

이란을 여행했던 몇 해 전 봄. 우크라이나 키예프공항을 경유해 터키 이스탄불에 도착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이란대사관을 찾아 여행비자를 신청한 것이었다.

당시엔 인터넷을 통해 비자신청서를 접수해야 했는데, 적어야 하는 항목이 족히 100개가 넘었다.

도대체 이런 건 왜 묻는 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항목도 많았다. 결혼 여부에서부터 이미 사망한 내 아버지의 이름, 이스라엘 여행 여부까지는 그래도 이해가 되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대체 눈동자 색깔은 무엇 때문에 적으라는 걸까.

게스트하우스 공용 컴퓨터 앞에서 몇 시간 동안 땀을 훔쳐내며 항목 하나하나를 채워나갔고, 그걸 이란대사관으로 전송한 후 자그마치 2주를 기다렸다. 그 기간 동안은 이스탄불 시내 곳곳과 교외까지를 여행했다. 최근 폭탄테러가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탁심거리`와 `술탄아흐메트 광장` 역시 당시 돌아본 곳이다. 

▲ 이란 소도시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풍경.
▲ 이란 소도시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풍경.
비자신청서를 보낸 지 보름째 되는 날에도 `여행비자가 발급됐으니 수령하러 오라`는 답변 이메일은 오지 않았다. 그쯤 되고 보니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 이렇게 한단 말이지. 기다린 게 억울해서라도 반드시 이란에 가고야만다”란 혼잣말을 했다.

이란을 여행한 경험이 있는 터키 사람을 만나 물으니 “이란 여행비자는 이스탄불보다 트라브존에서 신청하는 게 쉽게 받을 수 있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터키 동부로 가는 기차의 출발지인 하이다르파샤역으로 가서 티켓을 예매했다. 자그마치 1200km를 달려야 하는 에르주름행 기차표엿`다.

서유럽이나 일본, 한국처럼 시속 300km를 넘나드는 고속열차가 있다면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터키 기차의 평균시속은 50km에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연착도 잦았다. 결국 기차에서 네 끼를 먹고 34시간 만에야 에르주름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란 비자를 얻을 수 있는 흑해 연안의 항구도시 트라브존까지는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몇 시간을 더 가야했다. 지독하게 먼 길이었다.

트라브존 중심지를 벗어난 곳에 자리한 이란영사관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이스탄불에서 쓴 100여 개 항목의 질문이 있는 비자신청서를 다시 써야한단다. 울화통이 치밀었지만, 을의 입장이니 어쩔 것인가. 또 쓸 수밖에.

▲ 이란의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를 달리다보면 흔하게 만나게 되는 풍경.
▲ 이란의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를 달리다보면 흔하게 만나게 되는 풍경.
돌아가신 부친의 이름을 또 한 번 썼고, 눈동자 색깔을 적는 칸엔 `다크 브라운`이라고 써넣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는 주관식 문항이었다. “여행에서 돌아가면 곧 할 것”이라는 거짓말까지 했다. 무슬림 국가에서는 미혼의 단독여행자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날 알았다.

이 모든 과정을 마치고서야 가까스로 `Islamic Republic of Iran`이 선명하게 날인된 1개월짜리 여행비자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영사는 여권을 돌려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가시처럼 돋은 수염에 험상궂은 표정과는 전혀 다른 착한 웃음이었다.

이슬람성당인 `모스크`와 이를 호위하며 서 있는 커다란 기둥 `미나레트`, 무슬림들의 기도 시간을 알리는 `에잔`과 여성의 온몸을 검게 휘감은 `차도르`로 상징되는 이란. 바로 그 이란과 만나기 위해 어렵게 얻은 여행비자를 가방에 고이 모셔 넣고, 이란에서 가까운 터키 동북부 시골마을 도우베야짓을 향했다. 또 10시간이 넘게 버스를 타야했다. 멀미까지 날 지경이었다.

`노아의 방주`가 발견됐다는 풍문이 떠도는 도우베야짓. 거기서 사흘을 머물며 이란으로 들어갈 준비를 마저 했다. 현금지급기가 없는 이란에선 신용카드나 체크카드가 무용지물이라고 했다.

▲ 무더위 탓에 한낮의 이란 거리에선 걸어 다니는 사람을 보기 힘들다.
▲ 무더위 탓에 한낮의 이란 거리에선 걸어 다니는 사람을 보기 힘들다.
넉넉하게 달러를 환전하고, 엄청나게 느린 인터넷 속도를 참아가며 `안전한 이란여행`이란 키워드로 포털사이트를 검색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란으로 입국하는 날이 왔다. 이국의 태양이 머리 위에서 빛나던 봄날 오후.

터키 국경검문소를 넘어 이란 출입국사무소를 통과했다. 양국의 군인들이 총을 든 채 오갔지만, 대부분의 군인이 사람 좋게 웃고 있었기에 위협적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생했다. 영어가 전혀 통하지를 않았다. 동남아시아와 우크라이나, 터키 이스탄불에선 억지스럽게라도 먹혀들던 `여행자용 단문 영어회화`조차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시내라고 해봐야 끝에서 끝이 훤히 보이는 손바닥만한 이란의 국경마을 바자르간. 거기서 길을 잃을 줄이야.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 우리에겐 생소한 페르시아어가 적힌 이란의 청량음료.
▲ 우리에겐 생소한 페르시아어가 적힌 이란의 청량음료.
한국처럼 이란 역시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난 것인지 거리엔 노인들이 많았다. 그들 중 어떤 사람도 “버스터미널이 어디에 있나요”라는 질문에 답을 해주지 못했다.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이거 시작부터 왜 이러지”라는 말이 한숨에 섞여 나왔다.

이란은…

유럽과 아시아 중간지점 동·서문명 교류지 역할
무슬림 종교 특성상 술과 돼지고기 찾기 어려워

아라비아반도와 인도 사이에 위치한 국가.

파키스탄, 이라크, 터키, 아제르바이잔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대륙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탓에 오래 전부터 동·서문명의 교류지 역할을 해왔다.

1906년 근대헌법이 공포되고 1925년 팔레비왕조가 들어서 친서방 정책을 펼쳤다.

1979년 친서방-개방정책에 반대하며 이슬람 순혈주의를 지향했던 호메이니가 회교혁명을 통해 이슬람공화국을 수립했다.

면적은 164만8천㎢, 인구는 약 8천1백만 명, 수도는 테헤란이다.

▲ 빵에 치즈, 과일잼 등을 곁들인 이란 사람들의 한 끼 식사.
▲ 빵에 치즈, 과일잼 등을 곁들인 이란 사람들의 한 끼 식사.
페르시아인(51%)과 터키인(18%)이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고, 소수의 쿠르드인(7%)과 인근 아프가니스탄 등의 국가에서 유입된 이들도 각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아랍어를 사용하는 여타 중동국가와 달리 공용어는 페르시아어.

이슬람 시아파의 `맏형 국가`로 불린다.

이란 이슬람교도 중 시아파의 비율은 약 89%. 적은 수의 유대교와 기독교 신자가 있고,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는 이들도 있다.

최근 미국이 주도했던 국제사회의 경제제재가 풀림으로써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한 국가발전에 기대를 거는 국민들이 많아졌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산유국이며 외형적으로는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사실상의 정치권력은 무슬림 최고지도자인 이맘(Imam)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호메이니에 뒤를 이은 현재의 이맘은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국민들은 한때 `지구 위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불렸던 페르시아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 이란엔 외국인 관광객이 많지 않지만, 그들을 배려한 소규모 기념품가게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 이란엔 외국인 관광객이 많지 않지만, 그들을 배려한 소규모 기념품가게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고색창연한 왕의 궁전과 왕비의 사원이 존재하는 이스파한, 다리우스 황제의 여름별궁으로 사용됐던 페르세폴리스,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사막 가운데 건설된 도시 야즈드, 카스피해의 매력을 듬뿍 담고 있는 반다르 안잘리 등이 주요 관광지.

화폐단위는 이란 리얄(Rial).

공식적으로는 100리얄이 한화 약 4원이지만, 암시장에서의 외환거래는 공식 환율이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무슬림국가의 특성상 돼지고기 요리와 술을 찾아보기 힘들다.

밀가루 반죽을 넓게 펴서 화덕에 구운 빵과 치즈, 양고기와 닭고기 바비큐, 토마토와 오이 등 각종 채소가 서민들의 주식이다.

사진제공/류태규

국장席 홍성식 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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