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금와불처럼

▲ 조계종 통도사의 산내암자 중 하나인 통도사 자장암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계율이 높은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짓기 전에 이곳의 석벽 아래에서 수도하며 창건했다. <br /><br />
▲ 조계종 통도사의 산내암자 중 하나인 통도사 자장암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계율이 높은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짓기 전에 이곳의 석벽 아래에서 수도하며 창건했다.

눈이 녹아서 비나 물이 된다는 우수다. 우수, 경칩에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데 내 몸과 마음은 지칠대로 지쳐 있다. 며칠간의 불면증을 털어버리지 못하고 남쪽으로 달린다. 도로는 확장공사로 흙먼지를 일으키며 부산한데 그 틈바구니로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실눈을 뜨고 봄을 기다리는 나무들의 두근거림을 찾아 나는 좁고 어수선한 도로를 달린다.

어쩌면 홍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을 통도사를 애써 외면하고 곧장 자장암으로 향한다. 만개한 홍매화 소식을 접하고 두어 번 문안인사를 드리러 온 적은 있지만 일부러 암자를 찾은 적은 없다. 요염한 자태와 향기에 젖기 위한 나만의 시간, 그 사치스러운 여유를 오늘은 즐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통도사에서 바라보던 가파르고 잘 생긴 영축산의 품은 뜻밖에도 넓고 크다. 깎아지른 벼랑에 제비집처럼 걸려 있을 암자를 떠올린 건 실수였다. 차는 통도사를 지나 가파르지 않은 언덕길을 휘이휘이 돌고 돌아 고개를 넘는다. 그제서야 영축산이 제법 너른 들을 두르고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자장암은 멋진 개울을 앞에 끼고 맞은 편 골짜기에 숨어 있었다.

모든 번뇌를 내려놓으라는 108계단을 무심히 오른다. 성곽처럼 높은 돌 축대 위에 들어서자 간결하면서도 남성적인 영축산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고인돌을 닮은 돌문과 좀 더 깊은 세계로 안내하는 기와를 인 나무문의 어울림도 아름답다. 그 너머로 노송의 푸른 몸이 그림처럼 붙박혀 허공을 지킨다. 그리 크지 않은 암자의 고즈넉한 풍광 앞에서 숨이 멎을 것만 같다.

자장암은 1천400여 년 전 신라 진평왕 때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하기 전에 바위 아래 움집을 지어 수도하던 곳이다. 통도사 내의 칠방의 하나로 자장율사의 제자들이 수도하여 자장방이라 부르다가 회봉대사에 의해 중건되었다. 고종 때와 1963년에 중건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른다. 법당은 암벽 아래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옆에 4m에 달하는 마애불상까지 있어 짜임새가 훌륭하다.

어디선가 웅성대는 소리가 들린다. 법당 뒤쪽 암벽에서 나오는 석간수 앞에 한 무리의 여자들이 서 있다. 자장율사가 손가락만한 구멍을 뚫어 금개구리를 살게 했는데, 도력으로 오늘날까지 생존한다는 금와공 전설이 비로소 떠오른다. 입과 눈가에 금줄이 있고 등에는 거북모양의 점이 있는 개구리가 불심 지극한 불자에게만 보인다는 이야기, 나는 손가락 만하게 뚫려 있는 구멍을 들여다보기 위해 그들의 수다를 지켜보며 기다린다.

금개구리는 때때로 벌, 나비, 거미 등으로 변화무쌍하게 살아가며 여름철에는 바위가 과열되어 솥처럼 뜨거워도 그 위를 뛰어다닌다. 많은 참배객들이 금와보살이라 부르며 친견하고자 하지만 여간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불자도 아닌 내 눈에 보일 리가 없건만 나는 그 작은 구멍에 눈을 대고 이리 살피고 또 저리 살핀다. 은근히 기대감에 싸였던 스스로가 우습다.

이슬람과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양식이 공존하던 성소피아 성당에서 손가락을 넣고 한 바퀴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던 벽이 생각난다. 그 때도 나는 반질반질 닳고 닳아 구멍이 난 금속판에 손가락을 넣어보기 위해 긴 줄을 마음 졸이며 기다렸다. 그 한 바퀴를 위해 나는 온몸을 비틀며 안간힘을 쏟았고 그 뒤 허탈감을 맛보았다. 흥미 위주의 작은 행운조차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같은 모양이다.

금와당을 나와서야 나는 주법당을 들르지 않았음을 알았다. 관음전을 둘러보고 마애불의 순박한 표정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아미타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새겨져 있지만 지쳐 있는 몸과 마음 때문인지 마애불의 표정도 어두워 보인다. 멍하니 마애불과 마주 보고 서서 마음에 햇살이 일기를 기다린다. 마음이란 돌처럼 견고하기도 하지만, 여리고 변덕이 심해 사소한 것 앞에서도 온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금와불을 보았다고 너스레를 떨던 여자들이 관음전에서 빠져나와 까르르 웃음을 흘리며 사진을 찍는다. 비슷한 연배의 그들은 외모나 말투조차 닮아 있다. 관음전에서 절을 하는 동안 진지함과 엄숙함은 두고 나온 듯, 그들은 쉴 새 없이 속살거리고 웃어댔다. 은사시나무처럼 팔랑대며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나는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 조낭희<br /><br />수필가
▲ 조낭희 수필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법당에 홀로 앉아 시간을 보낸다. 절도 하고 싶지 않고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지도 않다. 몸과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도 무언가에 대한 정체 모를 갈증이 인다. 그동안 삶의 만족도와 행복의 기준은 얼마큼 진정성을 가지느냐로 가늠했던 것 같다. 가끔은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낯선 내가 되어 살아보고 싶다.

자장 율사의 신통력으로 살아가는 금와불은 결코 암혈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 스스로 겨울잠에서 깨어나 금개구리가 될 때 비로소 구멍 속의 금와불도 보일 것이다. 머지않아 경칩이 온다. 그 때는 폴짝폴짝 가볍게 뛸 수 있는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