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살았던 우리의 노래 문경아리랑
⑵ 문경아리랑의 기원을 찾아서

▲ 아리랑 일만수를 기록한 문구들

문경까지 가는 길은 아리랑의 뿌리를 찾는 일 만큼이나 멀었다. 아침 7시에 포항역에서 출발해 문경 시내에 위치한 점촌역까지 4시간이 넘게 걸렸다. 버스와 기차를 여러 번 갈아타야했다. 아리랑의 기원을 찾는 일 또한, 갈아타기의 연속이었다.

어떤 이들은 문경아리랑이 경복궁 중수를 계기로 생겨나서 퍼졌다는 것으로 그 기원을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헐버트가 채보한 서양식 악보에서 문경새재 대표 사설 한 구절을 확인한 것만으로, 그것이 곧 문경아리랑이라 쉽게 단정 지을 수 없고, 경복궁 중수라는 하나의 사건만으로 문경아리랑의 기원을 설명한다는 건 무리가 있다.

연못에서 산신령이 나타나 “네가 잃어버린 도끼가 금도끼냐? 은도끼냐?” 물어올 때, “금도끼가 바로 제 도끼입니다”하고 싶은 마음이 누군들 없겠는가. 하지만 진짜 잃어버린 도끼가 무엇인지 안다면, 도끼 두 자루를 모두 얻을 수도 있다.

`아리랑`의 어원도 마찬가지다. 경복궁 중건 때 부역꾼으로 끌려가는 낭군을 향해 `아리랑`(我離郞)이라고 한탄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 원납전을 가혹하게 거둬들이자 백성들이 원망하며 `아이롱`이라 노래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 알영(閼英)을 찬미하며 부른 것이라는 설 등 모두 나열하기가 힘들 정도다.

민속학을 전공한 문경시 옛길박물관 안태현 박사는 위와 같은 다양한 어원에 대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수긍했지만, “설은 설일 뿐, 문헌자료의 부족 등으로 확증할 수는 없다”며 아리랑의 어원으로 아리랑의 근원을 설명하려는 시도에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안 박사의 생각은 `아리랑`이란 단어에 집착하면 각 지역에 산재하는 다양한 아리랑의 정체성을 규명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문경새재 영남대로 `길의 경험`

안동서도 청송서도 울산서 마저도 한양 천리길 관문
새재와 이어진 모든 길에서 비롯된 공감이 노래로
문경아리랑, `박달나무민요`에 후렴구 아리랑 붙어

1929년도 여름 두 달 동안, 경성제대 법문학부의 한 남학생이 영남의 큰길과 샛길을 다니며 서른 개 군의 민요를 조사했다. 그는 이 논문으로 졸업하고, 훗날 한국민요사의 최초 연구자(이재욱)로 기억된다. 그가 남긴 표를 보면, 경상도 민요의 태반에 문경새재가 들어간다. 안동, 의성, 청송, 영주의 민요 제목이 아예 `문경아 새재야`인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런데 그 먼 울산에서도 그렇다.

청도 사람들은 문경새재 대신에 `뒷동산 산천`이라 노래한다. 청도를 지나는 길을 생각하면 그럴싸하다. 창원에서는 문경새재가 아니라 거제봉산이 등장한다. 민요의 이 다양성이 말해주는 바는 하나다. 이 노래들은 지역을 오가는 길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당신이 조선시대에 떨어졌다면, 당신이 위험한 이방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아리랑을 부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 중에서도 문경아리랑의 대표 사설을 부르는 게 최고의 선택이다. 조선사람 태반에게 문경새재는 어떤 공간보다도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바꿔 말해, 그 시기란 모두가 천리 길의 경험을 직간접적으로 알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는 것이다.

 

▲ 2013년 경주엑스포 행사의 하나로 펼쳐진 문경새재아리랑 공연
▲ 2013년 경주엑스포 행사의 하나로 펼쳐진 문경새재아리랑 공연

문경새재의 영남대로는 조선시대, 각 지역에서 서울로 가는 9개의 주요 도로 중 가장 대표적이었다.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가면 채 보름이 안 걸렸다고 한다. 영남 좌로가 15일, 영남 우로가 16일이 걸렸다고 하니, 그중 가장 빠른 길이었던 셈이다. 최단 거리를 자랑하는 길이자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뜻을 가진 문경의 영남대로는 과거길에 오른 선비들이 특히 선호하던 길이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산 넘고 물 건너 이문(利文)을 좇아 팔도강산을 다녔던 보부상들도 이 길을 걸었다.

보름간, 영남대로의 길은 저녁마다 어두워진다. 어둠 속에서는 산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더 가까이서 들려온다. 아무리 익숙한 길이라도 두렵다. 호환이 두려운 일행의 누군가 소리를 시작할 때, 모두가 지나온 문경을 떠올린다. 최근에 드라마로 볼 수 있다는 김주영의 `객주`에는 이런 경험이 생생히 담겼다. 봉삼이란 사내가 문경새재를 넘는 도입부에 박달나무숲을 헤치고 나아가는 모습이 인상 깊다.

우리 세대에도 길을 담은 노래가 있다. `남행열차`의 비 내리는 호남선과, 흐르는 강물 위의 `제3한강교`가 그것이다. 젊은 세대가 아무리 분위기를 살려 부른다 해도, 그 길에 대한 기억을 가진 이들의 감흥에 비할 수 없다.

영남대로를 걸어보지 않은 사람도 아리랑에서 감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천리길 경험의 보편성이 영남대로와 이어진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 이 보편성이 우리가 찾고자 하는 `문경아리랑`의 기원이다. 가까운 의성에서 먼 울산까지. 사람들이 굳이 문경새재를 입에 올리는 이유를 전부 알 길이야 없겠으나, 천리길에 걸친 노동요의 응집성이 느껴지는 것은 분명하다. 울산의 촌부가 불렀을 `문경아 새재야` 소리에서 그 험난한 길을 넘은 자들의 의지와 긍지를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울산 촌부의 이 노래를 문경아리랑이라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안태현 박사는 “어느 지역의 아리랑이건 그것의 기원은 토속민요라고 할 수 있다”며, “지역 사람들 사이에서 즐겨 부르던 민요에 아리랑 후렴구가 따라 붙은 것”이라 설명했다. 민요란, 전국 방방곡곡에서 저마다 달리 생겨난 노래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라는 공통된 후렴구가 각 지역의 민요 뒤에 붙어 특색 있는 다양한 아리랑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문경아리랑 또한 문경의 대표적인 민요인 `박달나무 민요`에서 시작된다. 송영철 옹이 문경아리랑을 “나무하러 가서 부르는 노래”라고 한다든가 일제강점기, 문경새재의 풍물을 소개하면서 언론에 `박달나무 민요`로 소개된 점을 보아서도 아리랑의 기원이 민요에서 왔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아리랑`이란 우리 민요 중에서도 그와 같은 후렴이 들어간 노래들의 주요 특징을 꼬집어 통칭하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아리랑 아리랑`하고 후렴을 부르다 보면 사설로는 미처 말하지 못한 심정들이 실린다. 특정한 경험을 드러내지 않는 후렴구야말로 모두를 통합하기 좋은 요소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아리랑은 말로 다 못할 심정을 담은 희로애락의 덩어리가 된다. 그렇게 `아리랑`이란 후렴구는 민요 뒤에 붙어 민요를 살려 놓았다.

▲ 문경시 문경읍 하초리 마을 입구에 새워진 문경새재아리랑 마을 표지석
▲ 문경시 문경읍 하초리 마을 입구에 새워진 문경새재아리랑 마을 표지석
경부선 철길과 새로 닦인 도로의 등장

`임자없는 나룻배에 임자가 없는 것`은 철교 때문이듯
새로난 길은 고개 넘는 고통을 잊게 했고 가사도 잊어
라디오에서 흐르는 유행가 민요 밀어내고 대중 속으로

후렴구인 `아리랑`만 남고 가사의 다른 내용이 우리와 결별하게 된 것은 철길과 도로의 시대가 오면서부터다. 경부선 철길과 도로가 생겨나면서 새재를 넘는 경험이 전승될 수 없음은 당연했다. 걷지 않으면 고개를 넘는 고통을 모른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토속 아리랑의 정서에 공감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하는 것이다. 문경새재가 어째서 각 지방의 아리랑에 등장하는지 이해되지 않을 만큼 격차는 컸다. 사설과 가사와 곡조를 단서로 발원지를 찾아나서야 할 만큼 우리의 일상에서 문경새재 옛길은 까마득히 멀어졌다.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가 만들어졌을 때, 나룻배에 임자가 없는 이유에 대해서라면 설명이 달리 필요 없었다. 기차가 다닐 철교가 놓이는데 강을 오가던 나룻배의 임자가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리랑은 임자 없는 나룻배 신세였다. 우리가 아는 아리랑은 어떤 아리랑인가? 민족적 저항과 인내의 상징이자, 결집과 정체의 상징이다. 아리랑은 아이러니하다. 민족적 상징이 강해지는 동안, 우리는 아리랑에 공감하지 못할 민족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나운규의 `아리랑`은 우리 민요의 공통후렴구를 더 강하게 호명했다.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었던 아리랑이라는 단어에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나운규 이후의 사람들은 민족적 저항의 상징을 그 말에 심었다. 우리가 아리랑을 기억하게 된 가장 강한 동력장치가 이때 장착된 셈이다.

 

▲ 아리랑 세계화 3차포럼을 마친 뒤 `아리랑 노래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포럼 참석자들
▲ 아리랑 세계화 3차포럼을 마친 뒤 `아리랑 노래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포럼 참석자들

철도와 도로를 대체한 것은 라디오와 유성기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1927년도 처음으로 라디오가 개국했을 당시 초대 청취자 세대는 1440호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 라디오로 들은 음악이 유행하면서 천리길을 직접 걸었던 민요의 전승자들은 매체에 귀 기울이는 대중이 되었다.

나이든 세대들이 주로 전통 음악을 선호하는 데 반해 젊은 세대들은 전통가요를 낡은 것으로 여기고 신식 유행가를 더 듣고 싶어 하였다. 또한 같은 세대라 해도 서로 자기 고향의 노래를 틀어달라고 아우성치던 때였다. 같은 아리랑이라도 어떻게 불리느냐에 따라 세대마다 선호가 갈렸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수요가 공급을 만들어내는 원리에 따라, 누군가의 아리랑은 조용해지고 누군가의 아리랑은 확산된다.

문경아리랑은 철도와 도로와 라디오와 음반이라는 새 시대의 매체 옆에서 소리 없는 민요가 되어갔다. 천리길의 중간기점으로서 떨치던 명성은 관광지의 명성이 되었다. 그 사이 문경의 민요를 부르던 사람들은 탄광으로 내려가거나, 대도시로 떠났다.

문경아리랑의 기원을 묻는 일은 이처럼 갈아타야 할 일이 많았다. 아리랑은 정선이 먼저냐 문경이 먼저냐 하는 식이라든가, 문경새재의 부역 경험이 경복궁 중수를 통해 전국에 퍼졌을 것이라든가 하는 기원에 대한 상상력은 비역사적이다.

 

▲ 2015년 `아리랑 일만수 사업`의 성공적인 완료를 축하하는 공연
▲ 2015년 `아리랑 일만수 사업`의 성공적인 완료를 축하하는 공연

우리가 얻은 답은 첫째가 먼 옛날의 경상도 아리랑이 한 줄기 천리길로 묶인다는 것이다. 문경아리랑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두 번째 답은 그 길이 낳은 민요 중 하나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우리가 옛날 아리랑를 부르던 조상들과는 성격이 다른 전승자라는 사실이다. 특히 후렴구 아리랑을 중심으로 민요 아리랑을 `우리`의 것으로 자각하고 소중히 하려고 노력한 것은 근대를 겪으면서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로 이 이유로 아리랑의 기원을 혼동한다. 그럴 만도 하다. 역사의 고개를 여러 번 넘으며 아리랑은 하나의 기원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졌다. 분명한 것은, 세계문화유산의 위상을 얻은 시점에서 아리랑으로 통합된 이 겹겹의 기원을 단순화하고 지역화하려는 욕망이야말로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철로가 비껴간 문경새재는 오늘날 영남대로 옛길을 고스란히 지켜냈다. 처음 옛길박물관에서 접한 책자의 제목이 이제서야 묵직하게 다가온다. `길 위의 노래, 고개의 소리, 아리랑`. 이 세 구절의 온전한 의미를 알게 되기까지 걸은 걸음을 세어보니, 문경을 찾아가기가 힘들다고 느꼈던 일이 머쓱하게 느껴진다.

강남진기자/이소연시인

    이소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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