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슬픔은 종이 한 장 차이

▲ 운람사 마당을 지키는 삼층석탑과 수려한 경관.<br /><br />
▲ 운람사 마당을 지키는 삼층석탑과 수려한 경관.

운람사는 산아지랑이(嵐)가 구름(雲)으로 피어오르는 절, 혹은 구름(雲)과 바람(嵐)으로 만든 절이란 뜻을 가졌다. 이름에서 설렘이 묻어난다. 하늘로 오르는 산, 천등산 정상 부근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을 향해 차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꺾고 꺾으며 힘겹게 오른다.

이름처럼 운람사의 풍경은 장관이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전해지지 않지만 유적과 유물을 통해 신라 신문왕(682-692년)때 의상 조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로 추정하고 있다. 운람사가 위치한 지형이 구름 가운데 반달이 솟은 형상, 운중반월형이라 그런지 굽이굽이 산능선이 파도처럼 물결치며 한 눈에 들어온다.

소박한 절은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 올린다. 묘한 향수와 정감에 싸여 경내로 들어서는데 뜻밖에 소란스럽다. 사찰 같지 않은 어수선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불을 지피며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들, 스님께 인사를 드리러 온 불자들과 마당을 뛰어다니는 아이들로 정신이 없다. 설 연휴 분위기에 들뜬 평범한 시골집 마당을 기웃거리듯 선뜻 들어설 수가 없다.

이끼 낀 삼층석탑만 분위기에 밀려 먼 데 산을 바라보며 쓸쓸하다. 사진을 몇 컷 찍으며 기다려 보지만 산만한 분위기는 쉽게 가시질 않는다. 절집을 가정집처럼 편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다가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모습에서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심기 불편한 마음을 안고 법당으로 들어선다.

주법당인 보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이 아니라 아미타불이 주불로 봉안되어 있다. 11세기경에 제작된 보물 1646호 초조본 불설가섭부불열반경 복장유물이 나온 불상이다. 절을 하는데 바깥의 소란스러움이 출렁출렁 법당으로 밀려든다.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마음이 평온하기는커녕 은근히 스스로에게 짜증이 난다. 이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불자도 아닌 나는 무엇을 위해 불전을 내고 절을 하는가?

앙증맞은 산왕각과 영험한 산신탱화도 감흥이 일지 않는다. 단지 소란함을 피해 천천히 축대 위에 있는 삼성각으로 향한다. 법당문은 열지도 않고 내 앞에 펼쳐진 겹겹의 능선들을 바라본다. 눈부실 만큼 아름답고 고요한 세계, 나는 모든 것을 잊고 풍경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서서히 마음이 평온해져 온다.

자연만큼 위대하고 존귀한 멘토가 있을까? 저 반대편 산에서 바라보면 천등산은 또 어떤 모습으로 보여질까? 자기 안에 갇혀서는 세상을 결코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누워 있는 산들이 내게 말한다. 사찰은 늘 정숙하고 침묵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싸여 평정을 찾지 못하고 붉으락푸르락 했던 마음들이 부끄럽다. 그 때 겹겹의 능선들 사이에 숨어 있던 와불이 선명하게 보인다. 거짓말처럼 마음이 꽃처럼 피어오르고, 와불이 조용히 내 안에 들어와 눕는다.

햇살 좋은 2월의 산사, 우측으로 소나무 숲길이 보인다. 길은 어떤 치장이나 오염도 없이 순결했으며 정성과 온기로 가득하다. 잘 다듬어 놓은 길 위에는 솔잎이 양탄자처럼 깔려 있고 나무들의 그림자가 가득하다. 천천히 자라는 소나무들이 세월의 소중함을 알려주고, 관목들은 낮은 곳에서 꿈꾸는 법을 일러 준다. 숲을 사랑하고 사색을 좋아하는, 성실하고 사람 좋아하는 스님이 계시는 모양이다. 고요한 숲길을 두르고 있는 운람사가 새롭게 다가온다.

숲은 적당히 시야를 가려 주어 자연스럽게 내면을 바라보도록 돕는다. 홀로 묻고 답하며 상상하다 보니 마음이 충만하다. 정상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길이 어디쯤 끝날지 알 수 없지만, 지척에 운람사가 있으니 두렵지가 않다. 편안한 마음으로 햇살 가득한 산길을 걸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머지않아 봄이 오면 적막하던 숲은 다시 부산하게 눈을 뜨리라. 숲은 기다릴 줄 알고 때로는 비축해 둬야 할 때를 정확히 알기에 오늘도 많은 것을 배운다.

무심코 우측 아래를 내려다보니 임도가 하얗게 눈을 덮어쓴 채 우리를 따라서 걷고 있다. 길은 넓고 잘 닦여졌지만 응달에 갇혀 겨울을 벗어나지 못하고 체념하듯 쓸쓸하다. 잠시 내가 걷는 길이 북쪽 길에게 미안해했다. 닮은 듯 다른, 길과 길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참을 같이 걷다 어느 시점에서 갈라섰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저 혼자 산모롱이를 돌아서 가버린 모양이다.

 

▲ 조낭희<br /><br />수필가
▲ 조낭희 수필가

산길을 걸으며 인생을 본다. 그리 높지 않은 산에도 서로 다른 길이 공존하고 있다. 만남과 이별, 햇살 가득한 날과 어둡고 그늘진 날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자만심에 빠져 우쭐거리거나 자괴감으로 힘들어 할 필요도 없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을 정확히 구분 지을 수 없으며, 양지가 음지로, 음지는 양지로 변하며 이어지는 게 인생이다.

내가 걷는 길은 산모롱이가 나타나기도 전에 운람사를 향해 내리막을 치닫고 있었다. 또 다른 풍경을 안고 내려오니 나무벤치가 말없이 기다리고 있다. 차들은 모두 빠져나갔고 경내는 조용하다. 그토록 바라던 고요와 침묵, 여느 절간과 다름없는 운람사의 모습 앞에서 왠지 마음이 허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