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살았던 우리의 노래 문경아리랑
① 문경 아리랑, 역사에 등장하다

▲ 문경새재에 세워져 있는 H.B 헐버트의 아리랑이 새겨진 비석. 우리민족 고유의 민요인 아리랑을 서양식 악보로 채록했다.  <br /><br /> /문경시 제공
▲ 문경새재에 세워져 있는 H.B 헐버트의 아리랑이 새겨진 비석. 우리민족 고유의 민요인 아리랑을 서양식 악보로 채록했다. /문경시 제공

2012년 12월 5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요 `아리랑`이 유네스코 무형문화재로 등재되면서부터 아리랑과 관련 있는 지방자치단체들의 관심이 보다 뜨거워졌다. 지역 사회의 아리랑 주도권싸움 또한 심화됐다. 그러나, 그로 인해 다양해야 할 아리랑의 저변이 축소되고 획일화 될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본지는 서양식 악보로 가장 먼저 세계인들에게 대표 사설 일부가 소개된 아리랑임에도 불구, 다른 지역 아리랑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문경아리랑`의 가치를 소개하는 기획기사를 연재한다.

“문경아리랑?”

문경에서 태어나 청년시절을 보낸 이 들이 “문경아리랑을 아느냐”는 질문에 보인 반응이다. 갑작스러운 물음을 접한 이들은 하나 같이 “웬 아리랑 얘기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리랑은 분명히 둘도 없는 한국의 상징이건만, 그 뿌리를 근처에서 찾고자 하면 오리무중이다.

정선아리랑학교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아리랑은 아리랑 또는 이와 유사한 음성이 후렴에 들어있는 민요의 총칭”이며, 남북을 통틀어 약 60여 종 3천6백여 수가 전해온다고 한다. 평안도 하면 서도아리랑, 강원도는 강원도아리랑과 정선아리랑, 함경도에는 함경도아리랑과 단천아리랑, 어랑타령, 경상도에는 밀양아리랑, 전라도에는 진도아리랑, 경기도에는 긴아리랑이라는 식으로 숱한 아리랑들은 지역 분류에 따라 이름을 얻었다.

지자체 입장에서는 이들 아리랑이 곧 지역의 얼굴이다. 꼼꼼히 거두어 대를 물려나가야 할 상징으로 아리랑만한 것이 없다. 국내에서는 지역을 대표하고, 세계 속에서는 한국적인 상징으로 알려진 아리랑. 발리우드 영화의 춤사위는 인도를 떠올리게 하고, 가부키 분장을 보는 순간 일본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아리랑도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1865년 시작된 경복궁 중수 공사
전국 아리랑 유행시킨 계기 마련
문경새재 오가는 영남 일꾼들
부역꾼 노동요로 재탄생 시켜

그렇다면 경상도의 아리랑은 어떤가? 현재로선 밀양아리랑 하나뿐이다. 남천강이 영남루를 지나고, 밤에는 아랑각을 비춘다는 사실이 밀양아리랑 속에는 들어 있다. 순식간에 밀양 인근의 전경을 떠올리게 만드는 힘. 그것이 이름을 얻은 아리랑의 힘이다.

경상도에는 아직 이름을 각인시키지 못한 아리랑이 많다. 노래로 능히 보존할 수 있음에도 기억 속에서 사라진 역사가 많다는 뜻이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방망이로 다 나가네
홍두깨방망이는 팔자가 좋아 큰애기 손질로 놀아나네
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요 아리아리랑 고개로 날 반겨주소

지금은 고인이 된 송영철 옹이 부른 문경아리랑의 일부다. 1980년대 문경 사람들은 문화원을 주축으로 문경아리랑의 발굴과 보전을 위해 아리랑을 채보하고 주민의 육성을 녹음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비석도 세우고, 한글 서예로 일만 수 아리랑을 남기기도 했다. 문경에 박물관을 세우고 아리랑도시 선포식도 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문경아리랑의 전초기지는 이제야 생겨났다.

 

▲ 문경시 점촌중학교 정문에서 돈달산 올라가는 등산길 계단에 설치된 문경새재아리랑 가사. <br /><br /> /문경시 제공
▲ 문경시 점촌중학교 정문에서 돈달산 올라가는 등산길 계단에 설치된 문경새재아리랑 가사. /문경시 제공

그러나 아직도 문경아리랑은 찬밥을 먹고 있다. 학계에서는 그 존재를 의심받고 세간에서는 굳이 알 필요가 없는 아리랑으로 인식돼 왔다.

문경 옛길박물관 여운황 학예사는 다른 지역에 비해 문경아리랑의 인지도가 낮은 이유를 “문경이 탄광도시였고 먹고 사는 문제로 바빴기 때문에 아리랑 연구가 미진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문경아리랑의 약세는 안타까운 일이다. 비단 문경 사람이나 경북도민만이 아닌, 한국인으로서의 아쉬움이다. 문경아리랑이 아리랑 전체의 탄생배경을 캡슐처럼 품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아리랑의 역사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경복궁과 한국의 아리랑이 어떤 관계인지 안다. 1865년부터 7년간 진행된 경복궁 중수는 다른 지역의 아리랑을 한양에 유행시키는 계기가 됐다. 강원과 경상에 유행하던 민요가 경복궁 중수라는 사건 덕분에 한군데 모였고, 한양 사람들은 이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아리랑 곡조를 듣게 됐다.

경북대 김기현 교수는 `문경새재 소리 아리랑의 아리랑사적 위상`을 통해 경복궁 중수공사 상황과 관련 지어 아리랑의 통속화를 설명한다. 문경의 토속민요였던 문경아리랑이 경복궁 중수 공사를 통해 전혀 다른 차원의 문화 즉, 통속 아리랑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대중화되었다는 이야기다.

 

▲ H.B 헐버트의 논문 마지막 단원에 `코리아 보컬 뮤직`(Korea vocal music)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악보는 최초의 서양식 채보 아리랑이다.                                        /옛길박물관 제공
▲ H.B 헐버트의 논문 마지막 단원에 `코리아 보컬 뮤직`(Korea vocal music)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악보는 최초의 서양식 채보 아리랑이다. /옛길박물관 제공

경복궁에서 함께 부역하며 만나지 않았다면 몰랐을 노래가, 요즘말로 `대세`가 되어 수십 년이 지난 1930년대에 이르면 서울의 본조아리랑에 모습을 드러낸다. 북한 명창 김관보의 창을 기준으로 보면 1950년대까지도 불린다. 경복궁 중수 공사가 일종의 방송망이 된 셈이다.

문경새재는 지리적으로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 상의 가장 험한 고개였다. 동시에 영남 사람들이 한양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영남의 일꾼들은 경복궁에 댈 물자를 짐으로 지고 왔다. 공사 자재를 문경에 가져다 놓으면, 그걸 또 충주나루까지 날라야 했다. 삼남에서 온 부역꾼들이 한양 내 거주하는 사내의 4배였다.

여운황 학예사는 “실제로 `경복궁 중수` 시기에 문경새재의 박달나무로 공사 현장에서 사용된 연장의 손잡이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사설 마지막에 `다나간다`는 표현은 문경새재의 나무들이 대량으로 베어져 헐값에 팔려나가는 상황에 대한 현지 사람들의 반감과 상실감이 표현된 것이다.

토목공사에 쓸 삽과 망치자루를 만드느라 문경의 박달나무들은 씨가 다 마를 지경이 됐다. 하루치 노동이 끝난 뒤를 상상해본다.

고단한 몸을 놀리며 부역꾼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때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일꾼들이 서로 어디서 왔는지 묻는다. 문경새재를 넘어온 사람들은 저마다 고달픔을 털어놓는다. 한창 땀 흘리던 낮에 들은 재미난 민요 소리를 누군가 다시 청한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방망이로 다 나가네”.

문경 고갯길의 고생담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다음날의 부역에서 이 노동요에 공감하는 이들이 더 늘어난다. 문경아리랑은 전국에서 강제 동원된 부역꾼들에게 동병상련의 공감을 얻어 다른 지역의 아리랑에 비해 상대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진다.

 

▲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책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헐버트의 자료를 인용해 `아리랑`의 악보와 사설을 실었다.           /옛길박물관 제공
▲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책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헐버트의 자료를 인용해 `아리랑`의 악보와 사설을 실었다. /옛길박물관 제공

요약하면 `경복궁 중수`는 동원된 일꾼들의 고향 민요가 다양하게 불리던 현장이라는 것이고, 그 중에서도 문경아리랑은 부역의 앞뒤 맥락을 가장 직접적으로 담은 덕분에 일꾼들의 마음을 묶는 끈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최초 서양식 채보 아리랑 남긴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
논문서 대표사설 그대로 실어
대중화된 문경아리랑 가치 인증

이처럼 널리 불리게 된 문경아리랑이 통속화된 현장을 찍은 사람이 있다. 그 사진은 필름이 아닌 한 장의 악보다. 1896년 미국인 선교사 H.B 헐버트의 논문 마지막 단원에 `코리아 보컬 뮤직`(Korea vocal music)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악보는 최초의 서양식 채보 아리랑이다.

어느 지역의 아리랑도 최초의 아리랑이라고 함부로 명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경아리랑을 언급할 때 최초라는 꾸밈말이 고집스럽게 따라붙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헐버트 박사가 채보해 외국에 소개한 서양식 악보에 문경아리랑의 대표 사설 일부가 그대로 실려 있기 때문이다. 영문으로 기록된 사설을 우리말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아라릉 아라릉 아라리오/아라릉 얼사 배 띠어라
문경새재 박달나무/홍두깨 방망이 다나간다

문경 주민들과 일부 학자들은 문경아리랑이 헐버트 박사의 채보 기록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여긴다. `~이 ~으로 다나간다`는 패턴은 문경아리랑 대표 사설의 특징적인 부분으로, 즉흥적으로 모방해 차용하기 좋은 구조를 취하고 있기에 확산의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 미국인 선교사 H.B 헐버트의 논문에 수록된 악보.<br /><br />/옛길박물관 제공
▲ 미국인 선교사 H.B 헐버트의 논문에 수록된 악보. /옛길박물관 제공

선교사였던 헐버트가 문경아리랑의 대표 사설 한 구절을 남겼다면, 그로부터 30년 뒤에는 신문들이 문경아리랑의 원형인 박달나무 민요를 전한다. 외국인이 듣고, 신문이 기록할만큼 이 노래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이와 관련 안태현 학예사는 “1925년 3월 16일자 동아일보 지면을 포함한 다수의 매체에서 문경아리랑 원형 네 구절을 확인한 바 있다”며 “그보다 이른 시기의 다른 매체에서도 문경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며 문경아리랑을 함께 실었다”고 덧붙였다.

그밖에도 문경아리랑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사료로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여행기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1898), `신찬속곡집`(1923), `조선속곡집`(1929), 일제강점기 때의 엽서 등이 존재한다.

문경아리랑은 역사의 지난한 고갯길을 넘어왔다. 낡고 빛바랜 표지의 오래된 문헌들 속에서 기어이 살아남은 문경아리랑의 존재가 고맙게 느껴진다. 힘겹게 과거를 살아낸 문경아리랑은 다른 어떤 것보다 생명력이 질긴 노래다.

강남진 기자/이소연 시인

    강남진 기자·이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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