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백나무 숲에도 바람이 분다

▲ 키 큰 편백나무들로 에워싸인 통영 미래사의 풍경이 겨울 한파로 움츠러들었던 마음에 따사로움을 안겨주고 있다. <br /><br />
▲ 키 큰 편백나무들로 에워싸인 통영 미래사의 풍경이 겨울 한파로 움츠러들었던 마음에 따사로움을 안겨주고 있다.

전국을 강타한 한파가 누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동안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 정겨운 다도해와 낭만의 편린들을 안고 살아가는 동양의 나폴리, 따뜻한 통영 앞바다가 그립다. 그곳에 가면 미륵불이 오기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미래사를 볼 수 있다.

오늘 같은 날은 절을 에워싼 편백나무 숲을 거닐고 싶다. 피톤치드 향기로 샤워를 하고 나면 온몸은 파랗게 물이 들고 지쳐 있던 영혼도 금세 생기를 찾을지도 모른다. 바다를 끼고 달리던 차가 어느 지점에서 급하게 산비탈을 향해 꺾어들고, 1Km쯤 오르면 하늘을 찌를 듯 키 큰 편백나무들이 나타나 미래사가 지척에 있음을 알려 준다.

미래사는 미륵신앙이 살아 숨 쉬는 미륵산 남쪽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 스님의 상좌였던 구산 스님이 석두, 효봉 두 스님의 안거를 위해 1954년에 창건하였다. 역사는 짧지만 주로 효봉 큰스님의 문도들이 키워온 선도량으로 법정 스님이 출가하여 효봉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행자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다.

불영담이라는 작은 연못과 구름처럼 떠 있는 아치형 다리, 그 너머 숨어 있듯 모습을 드러내는 사찰과의 조화는 사진 속에 등장하는 한국의 옛 정원을 보는 것처럼 운치 있고 멋스럽다. 불영담은 동장군에 밀려 얼어붙은 채 침묵 중이다. 그러나 얼음장 밑에는 벌거벗은 물고기들이 봄을 기억하며 유영할 것이다. 편백나무들은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길을 밝힌다.

전각들이 아담한 정원을 중심으로 서로를 보듬으며 둘러 서 있다. 가람의 크기나 배치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소박하다. 병풍처럼 사위를 둘러싼 편백나무들의 기상 때문인지 겨울 절간답지 않게 안온함과 평화로움이 넘친다. 미래사와 편백나무, 미륵산은 각자 존재감을 잃지 않으면서 서로를 배려한다. 절은 미륵산의 유명세에 눌리지 않고, 편백나무 숲도 절의 배경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주체이면서 객체가 되어 자리를 빛낸다.

미래사의 가장 큰 보물은 편백나무 숲인지 모른다. 십자 팔작 누각의 범종루나 티베트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삼층 석탑보다 절을 호위하고 있는 편백나무 숲에 오래도록 눈길이 머문다. 효봉 스님이나 법정 스님에 대한 친근한 일화와 맑은 정신을 그리다보니 마음이 따뜻해져 온다. 편백나무 숲과 잘 어울리는, 단아하면서도 정갈한 사찰이다.

`한려해상 바다 백리 길`의 시작점이라 그런지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들른다. 오늘도 요사채 영매당 마루 위에 서너 명의 등산객이 햇살을 받으며 웃고 있다. 그들에게서 향기로운 미소가 날린다. `세상의 모든 일에 부딪혀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슬픔 없이 티끌 없이 안온한 곳, 그것이야말로 더 없는 행복이네.` 입구에서 본 글이 클로즈업 된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마음 다스리는 일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 날마다 기도를 하고 마음을 비워 보지만 의식보다 먼저 자리를 잡는 숱한 감정과 욕망들, 나는 얼마나 좌절했던가? 인생이란 바라보기의 연속이다. 묵묵히 있는 그대로의 나와 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내 시선은 언제나 너무 깊거나 얕았다. 그러나 어이하랴?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나아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것이 비록 허무하게 제 자리에서 맴돌다 그칠지라도.

법관으로서 첫 사형선고를 내린 후 존재와 삶에 회의를 품고 출가한 효봉 스님이나 평범한 대학생활을 접고 큰스님의 제자가 된 법정스님을 떠올린다. 무엇이 그 분들을 이곳으로 이끌었으며, 진정 내 안에서 다투고 있는 갈등의 정체는 무엇인가? 내 안의 소리를 찾아 나는 천천히 절을 빠져나와 절 뒤쪽으로 나 있는 편백나무 숲길을 걷는다.

편백나무 꼭대기에서 바람이 파도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쏴아쏴아 무서운 바람소리에 나무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바람은 허공에서 몸부림치다 멀리 사라져 버린다. 나는 심연의 바닷속을 헤엄치듯 편백나무 숲길을 걷는다.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또한 인간에게 의지가 주어졌다는 건 얼마나 위대한 축복인가?

 

▲ 조낭희 수필가
▲ 조낭희 수필가

편백나무 숲을 지나 소나무와 잡목 숲 사이로 난 등산로로 접어든다. 잡목들은 숭숭 구멍이 뚫린 가슴으로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다. 신명난 바람이 내 얼굴을 따갑게 때리고 나무들의 옆구리를 할퀴며 지나간다. 숲은 저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살아가는 방법도 다르지만 바람이 있어 더 풍요롭고 의연한지 모른다. 정상에 이를 무렵 내 등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바람이 심해 케이블카 운행을 중단한다는 방송에 사람들이 황급히 자리를 뜬다.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을 밟은 후, 바람 같은 웃음을 날리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올 때처럼 제일 긴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갔다. 나는 아무도 없는 정상에서 한동안 바람을 맞고 떠나보내기를 반복했다. 내 안은 텅 빈 것처럼 가볍다가 이내 또 무언가로 꿈틀댔다. 땀이 식어 등줄기가 선득한데 또 바람이 몰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