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에 이는 바람 소리에

▲ 영덕 장육사 홍원루.<br /><br />
▲ 영덕 장육사 홍원루.

햇살 좋은 오늘, 영해 바다는 화사한 옥색 치마를 두르고 저 혼자 꿈을 꾸듯 살랑댄다. 바람까지 상큼하다. 장육사 가는 길은 바다를 두고 산을 향해 달린다. 슬쩍 돌아보면 여전히 눈부신 바다가 따라올 것만 같다.

저만치 일주문이 보이는데 길은 엉뚱한 곳으로 비켜나 있다. 오직 한마음으로 진리에 귀의한다는 뜻을 가진 일주문은 사바세계에서 오는 사람을 맞지 못하고 개울 건너에서 섬처럼 홀로 떠 있다. 쓸쓸함을 삼키고 먼 곳을 응시하는 일주문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제 역할과 기능을 다 하지 못한다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장육사는 1355년 고려 공민왕 때, 이곳이 고향인 나옹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열두 살에 친구의 죽음을 보고 문경 공덕산 묘적암에서 승려가 된 나옹 선사는 공민왕의 스승으로, 왕의 청을 받아들여 내전에서 설법도 하고 왕사가 되어 이름을 떨친다. 나옹선사의 명성만큼 한 때는 장육사를 찾는 이도 많았을 것이다. 세종 때 산불로 사찰이 소실되어 중건했지만 또 다시 임진왜란 때 왜적들에 의해 폐찰된 것을 1900년 중수했다.

작은 주차장 앞에서 길은 멈춘다. 가슴에 담아 왔던 동해 바닷빛이 운서산 위로 펼쳐져 있고 그 아래 성성한 기운의 소나무들이 산사를 호위하고 있다. 앙상한 가지에 매달려 몸을 녹이는 감들, 따사로운 장육사의 겨울 풍경 앞에서 오히려 가슴이 시리다. 순백의 지성을 겸비한 눈 쌓인 산사나 혹한 속에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 올리는 장육사의 모습을 그려본다. 어쩌면 앞으로 칼날 같은 지성을 겸비한 겨울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유명한 나옹선사의 선시를 떠올리며 잘 닦여진 돌계단을 오른다. 당당한 풍채로 손님을 맞는 홍원루에게서 여유와 멋스러움이 느껴진다. 누하진입식으로 홍원루를 통과하자 정면 높은 곳에 대웅전이 기다린다. 아늑할 거라 기대했는데 경내는 엄숙함도 긴장감도 내려놓고 어수선하다. 몇 해 전 여름, 일행들과 나란히 앉아 사진을 찍던 요사채는 사라지고 황량한 빈터에 중장비 두 대가 하던 일을 멈추고 서 있다. 화재로 소실되었는지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익숙했던 인연의 부재만큼이나 공허하다.

간헐적으로 풍경이 울어대는 고즈넉한 산사, 스님께 차 한 잔을 대접 받으며 나옹 선사의 정신과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행운을 꿈꾸었는데 기대는 산산이 무너졌다. 사전에 정보도 없이 무턱대고 길을 나선 내 잘못이다. 멋쩍게 서성이는 나를 전각들이 멀뚱히 둘러서서 바라본다. 참 어색한 해후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아니라 아미타부처님이 봉안되어 있는 대웅전에 들어가 예를 갖추고 서둘러 관음전으로 향한다. 보물 제993호 건칠관음보살좌상을 자세히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건칠불이란 진흙으로 속을 만들어 삼베를 감고 그 위에 진흙가루를 발라 굳힌 다음 속을 빼내어 만든다. 그러나 86cm의 이 보살상은 삼베 대신 한지를 이용하여 만든 조선 초기 작품이다.

환하게 비쳐드는 햇살을 업고 관음보살좌상을 향해 삼배를 한다. 겨울 법당치고는 따뜻하고 평화로운데 무언가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상체가 약간 앞으로 숙여진 관음상에게서 인간적인 고뇌와 안쓰러움이 느껴진다. 마치 등신불을 대하듯 가슴 한켠이 저리다. 순간 묵묵히 희생하며 자식들을 키워낸 한국의 어머니상을 떠올리고 말았다.

불자들이 염불할 때 가장 많이 찾는다는 관세음보살, 이상하게 장육사의 건칠관음상에서는 인간적인 친숙함이 먼저 느껴진다. 병든 어머니의 쾌유를 기원하며 대웅전을 짓던 목수가 생각난다. 완공되기도 전에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자신의 부족한 정성을 비관하여 종적을 감추었다는 슬픈 전설 때문일까?

관음상과 나 사이의 어색하던 기운이 사라진다. 쉽게 인간적인 교감이 이루어질 것만 같다. 화려한 옷과 장신구를 걸치고 있지만 헤질 듯 얇고 닳아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만 같은 관에서 시선을 거둘 수가 없다. 모든 탐욕과 번민을 내려놓고 시선은 다소곳이 아래로만 향한다. 나는 우리의 삶에서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어머니의 모습을 읽는다.

 

▲ 조낭희 수필가
▲ 조낭희 수필가

600여년 동안 수많은 불자와 애환을 같이 했을 관음상, 언젠가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처럼 온몸에 피가 돌고 영혼이 심어져 온화한 미소를 띠울 것만 같다. 어머니와 함께 했던 어린 날들을 떠올리고 지금의 나를 돌아본다. 모성애만큼 눈물겹고 위대한 사랑이 있을까? 낙엽처럼 가벼운 몸으로 긴 세월을 견뎌 온 건칠관음보살좌상이 어머니만큼 소중하고 위대해 보인다.

법당을 빠져나오는 발걸음이 무겁다. 생각에 잠겨 홍련암으로 향하는데 대숲이 일제히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속을 비운 채 유연하게 왕대의 꿈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 작은 바람에도 온몸으로 서걱이며 잠 못 드실 어머니 생각에 가슴이 젖는다. 세월이 갈수록 빚진 사랑은 늘어만 가는데 나는 또 염치도 없이 어머니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