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 위에서
마케도니아 ②

▲ 진홍빛으로 아름다운 석양의 오흐리드 호수.

마케도니아의 조용한 시골마을 오흐리드를 떠올릴 때면 해질 무렵의 빛깔이 자연스레 그려진다. 바다처럼 넓은 호수를 배경으로 서서히 붉게 떨어지는 태양. 물론, 석양이 아름다운 곳은 세상에 많다.

라오스의 루앙프라방과 앙코르와트가 있는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만난 저녁 풍경도 일품이었고, 사막을 여행하며 본 이란 야즈드의 석양 역시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그러나, 오흐리드의 일몰은 여기에 매력 하나가 더 추가된다. 여행자의 마음을 한없이 평화롭게 가라앉히는 순정함이 바로 그것. 편안함과 나른함의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호수와 진홍빛 석양. 오흐리드는 석양으로 기억되는 도시다.

낮 동안 빛과 열기를 토해내며 동네와 숲을 달구던 태양이 호수 저편 수평선 뒤로 사라지는 시간. 하늘과 그에 맞닿은 호수는 물론,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까지 서서히 붉게 물들어가는 풍광. 그림 같은 고적함 속에서 백조가 우아하게 헤엄치고 있었다.

비단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대부분이 걷는 `평범한 길`이 아닌 스스로 만든 `자신만의 길`을 걷고 싶어 한다.

아침이면 졸린 눈을 부비며 출근해 점심으로 칼국수나 갈비탕을 먹고, 저녁이면 피곤에 찌든 채 집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는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누군들 벗어나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거길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일상이 주는 안정감과 세상에 자신의 고정된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는 자족감을 떨치기가 힘든 까닭이다.

 

▲ 인접국인 터키의 영향으로 마케도니아에도 입자가 굵은 `터키식 커피`를 즐기는 이들이 많다.
▲ 인접국인 터키의 영향으로 마케도니아에도 입자가 굵은 `터키식 커피`를 즐기는 이들이 많다.

마음속에선 방랑의 유전자가 요동치지만, 현실은 녹록지가 않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선 현재 하고 있는 일과 낯익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일시적으로 중단해야 한다. 그 공백이 주는 두려움 앞에 누구나 머뭇거리게 된다. 그러나, 하나를 포기해야 다른 하나를 얻는 법. 세상사 모든 일이 그렇지만 여행 또한 삶의 통과의례라 할 선택의 과정 중 하나고, 그 선택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바로 그 용기를 발휘해 `정주의 삶`에서 잠시잠깐 떠나 `유랑의 길`에서 만난 마케도니아의 소도시.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부끄러워했던 경상도 사내가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하게 만든 호숫가마을. 거기가 바로 오흐리드다. 잠시잠깐 머물렀던 그곳의 매력에 빠져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거쳐 슬로베니아까지 올라갔다가 이탈리아 베니스행 열차 티켓을 환불하고는 하룻밤 사이 세 나라의 국경을 숨 가쁘게 넘어 돌아왔던 오흐리드.

그 마을로 돌아갔던 이유는 앞서 말한 저물녘 풍경이 그리워서였을까? 그것만은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이었을까. 필자는 오흐리드의 어떤 부분에 매료됐고, 거기 무엇이 있기에 대책 없는 사랑에 빠진 것일까.

오흐리드는 인구 4만 명의 작은 소읍이다.

관광객들에게 기념품과 호수 풍경이 프린팅 된 셔츠 등을 파는 시내 중심가는 걸어서 10분이면 모두 돌아볼 수 있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올드타운`도 크기가 겨우 손바닥만 하다. 하지만, 그 작은 공간 안에 들어찬 아름다움으로 인해 휴가철이면 거리와 숙소마다 북유럽과 서유럽에서 온 여행자들이 흘러넘친다.

 

▲ 붉은색 지붕과 푸른빛 호수가 빚어내는 평화로운 풍경, 오흐리드.
▲ 붉은색 지붕과 푸른빛 호수가 빚어내는 평화로운 풍경, 오흐리드.

붉은 지붕이 햇살 아래 빛나는 정교회 교당과 무슬림을 위한 모스크, 지어질 당시의 형태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고대 원형극장 등은 오흐리드의 자랑거리다.

여기에 1천 년 전 축조된 요새가 마을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어 관광객들의 눈길을 잡아챈다.

무엇보다 매력적인 오흐리드의 보물은 드넓은 호수. 이미 수백만 전부터 마케도니아 사람들의 흥망성쇠를 바로 곁에서 지켜본 호수는 인접국 알바니아까지 뻗어있어 그 크기부터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게다가 수심 수십m 밑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깨끗함까지 갖췄다.

호숫가 전망이 좋은 지대엔 유럽풍과 오스만투르크 건축양식이 조화롭게 버무려진 근사한 레스토랑과 예쁜 카페가 지천이다. 가격 역시 서유럽 관광지에 비하면 저렴하다.

스프와 샐러드, 생선 바비큐에 아이스크림까지 제대로 갖춰 저녁식사를 한다고 해도 1000데나르(한화 약 2만1천원)면 충분하다.

카페 테라스에서의 커피 한 잔도 2000원 내외. 거기서 보낸 40여 일은 소박한 호사를 마음껏 누린 잊을 수 없는 한시절이다

고대 극장과 카페에서 보내는 낮 시간이 지나면 곧 저물 무렵. 태양이 제 집으로 돌아가는 때가 되면 편안한 슬리퍼 차림으로 수십 년을 살아온 동네를 산책하듯 석양과 만나기 좋은 곳을 향했다. 빨간색 물감 수만 통을 한꺼번에 뿌려놓은 듯 명징하게 붉은 오흐리드의 석양은 볼 때마다 감탄사를 연발하게 했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현실의 풍경이라 믿기지 않는 저물 무렵의 태양 아래로 산책 나온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걸어 다녔다. 아주 느리게.

그럴 때면 호수처럼 푸른 눈동자에 새하얀 피부를 가진 아기들은 물론, 세파에 찌든 노인들의 얼굴까지 사랑스럽게 보였다. 그들이 오래 헤어져 살아온 식구 같았다.

 

▲ 마케도니아 지폐는 색채와 디자인이 독특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 마케도니아 지폐는 색채와 디자인이 독특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헬로우”라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로 먼저 인사를 하면, 너나없이 반가운 몸짓과 환한 미소로 이방인을 반기던 오흐리드 사람들. 그곳에서 머문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들과의 친밀도는 더 높아졌다.

한 달쯤이 지났을 땐 허술한 낚싯대로 손가락보다 조그만 물고기를 잡던 동네 소년들과도 친해졌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맑고 투명한 호수와 아이들이 그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만을 앞에 놓고도 한참을 숨넘어가듯 함께 깔깔거리곤 했으니까.

그랬다. 마케도니아 오흐리드의 낮은 평화롭고 고요했으며, 붉은 태양을 선물하는 저녁은 어떠한 빼어난 은유법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낭만 그 자체였다. 그런 낭만적 풍경 속에 잠겨있을라치면 당연지사 술 한 잔이 절실해진다.

유럽의 맥주는 풍미가 좋기로 유명하다. 마케도니아 맥주 `스콥스코` 역시 시원스럽게 넘어갔고 거품이 풍부했으며 향도 달콤했다. 여행객들이 스콥스코를 선호한다면, 현지인들은 `킹 마르코`란 이름의 맥주를 즐겼다.

자두나 청포도를 원료로 만든 증류주 `라키아`도 마케도니아를 포함한 발칸반도를 대표하는 술이라 할 수 있다.

알코올 도수가 50~60도를 넘나드는 독주지만, 탄산수나 소다수로 희석해 마시면 깔끔한 맛을 내고, 다음날 숙취도 거의 없는 게 특징. 여기에다 동네 슈퍼에서 판매하는 수십 종의 포도주도 빼놓을 수 없다. 오흐리드엔 가격은 싸고 품질은 좋은 포도주가 지천이니 그걸 거부할 이유가 없다.

오흐리드의 석양과 마주하고 마시던 스콥스코는 까맣게 잊고 있던 생에 대한 열정을 새삼 떠오르게 했고, 잘 꾸며진 숙소 정원 나무의자에 앉아 20대 대학생들과 함께 마셨던 마케도니아 와인 `멧돼지의 피`는 사라지고 있던 문학소년의 심정을 되찾아줬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아닌 것 같다.

▲ 오흐리드 호수 위를 여유롭게 헤엄치는 백조.
▲ 오흐리드 호수 위를 여유롭게 헤엄치는 백조.
마케도니아,
제대로 즐기는 3가지 방법

유럽 문화와 오스만투르크의 문화를 동시에 만날 수 있는 마케도니아.

여기에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자연환경까지 더해져 스코페, 오흐리드, 스트루가 등 마케도니아의 도시는 저마다의 매력을 뿜어낸다. 아래 마케도니아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 3가지를 추천한다.

1. 스코페의 올드타운 천천히 걸어보기

정교회 교당과 가톨릭 성당, 거기에 이슬람 모스크까지를 동시에 만날 수 있는 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페. 특히 올드타운엔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넘쳐난다. 조그만 교량을 경계로 신도심과 구도심이 나눠져 있는데, 현대적 감각의 레스토랑과 카페가 즐비한 신도심도 좋지만, 수백 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구도심이 보다 매혹적이다. 울퉁불퉁한 돌이 깔린 거리를 천천히 걷다보면 터키식 커피 향기와 풍겨오는 케밥 냄새가 관광객을 유혹한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기념품 가게를 돌아다니다보면 예쁘장한 도자기나 그릇을 싼값에 구매하는 행운도 누릴 수도 있다.

2. 도시 외곽의 와이너리(Winery·포도주 양조장) 방문하기

프랑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동유럽의 포도주도 독특한 향과 맛으로 지구촌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마케도니아 역시 포도주를 만드는 양조장이 흔하다. 스코페와 오흐리드의 호텔이나 여행사에서 팀을 구성해 와이너리를 방문하는 `1박2일 단기 여행상품`을 소개받을 수 있다. 햇살 눈부신 한적한 시골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마케도니아 포도주를 마셔보는 것도 여행의 낭만을 더하는 한 방법이다. 가격도 저렴해서 2유로(한화 약 2천600원)면 포도주 1L를 살 수 있다.

3. 호숫가 안락의자에서 하루종일 뒹굴기

유명 건축물 앞에서 여러 장의 기념사진을 찍고, 교과서에서 보던 화가의 작품을 감상하며 바쁘게 미술관을 돌아다니는 것은 한국인들이 가장 쉽게 선택하는 여행법이다. 나쁠 것 없다. 하지만, 여행이란 단어 안에는 `일상의 분주함을 내려놓고 편히 쉬는 시간`이란 의미도 분명 포함돼 있을 터.

수백만 년 전 생성된 투명한 물빛의 호수가 자리한 오흐리드나 스트루가에 간다면 하루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호숫가 안락의자에 느긋하게 누워 책을 읽거나, 남부 유럽의 따스한 바람이 달콤하게 익힌 새빨간 체리를 먹으며 유유자적 해보기를 권한다.

그렇게 즐기는 한가로운 시간은 바쁘게 달려온 현대인들을 위한 작지만 의미 있는 선물이지 않을까.

사진제공/류태규
국장席 홍성식 기자/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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