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리근, 서로 다른 둘의 조화

▲ 향일암에서 바라본 바다.<br /><br />
▲ 향일암에서 바라본 바다.

겨울 안개가 자욱한 아침, 새해 첫 산사기행을 나선다. 남편의 차에는 클래식 음악이 흐른다. 바쁘다는 핑계로 남편의 음악적 취향이 바뀐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부재된 아내의 자리 앞에서 약간의 어색함과 미안함이 밀려든다. 다행히 좁은 차 안은 음악실이 되어 활기를 띤다.

그는 웅장하고 스케일이 큰 심포니 곡을 좋아하고 나는 고독과 애잔함이 느껴지는 독주곡이나 콘체르토를 좋아한다. 곡이 바뀔 때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짧은 지식을 곁들인다. 베토벤의 열정, 쇼팽과 연상의 여인 조르주 상드의 사랑, 슈베르트의 가난과 요절 따위를 이야기하며 남쪽으로 달린다. 평이하던 그가 연인처럼 새롭게 다가온다.

안개 속으로 숨어든 겨울 풍경, 자동차들이 질주하고 음악이 강물처럼 흐른다. 이순신 대교의 날렵하면서도 웅장한 자태, 그 너머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산업단지의 연기, 여수의 하늘은 봄날처럼 눈부시다. 먼나무가 빨간 열매로 치장을 하고 간간이 후박나무가 묵직한 눈빛으로 길을 밝힌다.

여유로운 정취는 잠시 뿐, 향일암 길목은 차량과 인파로 북새통이다. 갓김치며 말린 해산물들이 즐비한 상점을 지나 291개의 계단을 밟으며 가파른 바위산을 오른다. 내 안에 있는 모든 생각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사뿐히 오르고 싶은데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이러다가 내가 나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향일암은 의자왕 4년(644년) 원효대사가 원통암이란 이름으로 창건하였다가 고려 광종 9년 윤필대사가 섬의 형세를 보고 금오암이라 개명하였다. 그 뒤 조선 숙종 때 인묵대사가 관음전 아래 대웅전을 짓고 금불상을 조성, 봉안한 후 향일암으로 고쳐 불렀다. 낙산사의 홍련암과 남해 금산의 보리암, 강화도 보문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4대 해수관음기도처 중 하나이다.

집채만한 바위를 칼로 잘라놓은 듯 좁고 기다란 바위통로가 나타난다.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통과하지 못한다는 해탈문이다. 한 사람이 겨우 빠져나가는 돌문을 통과하자 연이어 두 번째 석문이 기다린다. 엄숙하고 경건하기보다 탐험을 하듯 재미있다. 어느 틈에 겨울나무 사이로 에머럴드 바닷빛이 펼쳐져 마음을 휘저어 놓는다.

가파른 바위 절벽에 향일함이 있다. 원통보전 뒤로 책을 쌓아놓은 듯 높다란 바위도 이색적이다. 원효대사가 경전을 걸망에 다 담지 못해 허공에 던지자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이 떠오른다. 거북 등껍질처럼 육각모양이 새겨진 바위는 자연이 만든 기이한 예술품이다. 남해를 붉게 물들이며 솟아오를 태양과 온몸으로 해를 품을 향일암, 점점이 피어나는 붉은 동백꽃의 열정 앞에서 누군들 합장하지 않으랴. 게다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돌거북들이 난간마다 줄을 지어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아미타부처님이 계시는 연화세계는 어디쯤 있을까?

아무래도 날을 잘못 택한 것 같다. 인파 속에서 향일암의 기운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이다. 체념하듯 마음을 비우고 가만히 바다를 바라본다. 깊고 아름다운 빛깔을 품으며 살고 싶다. 기도 대신 너른 바다를 내 안에 담는다. 관음전 가는 길에도 돌문이 두 개 있다. 자세를 낮추고 마주 오는 사람들을 배려해야 통과할 수 있다. 보다 높은 세계로 향할 때 우리는 이처럼 겸손해져야만 한다.

원효대사가 수행하다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다는 유서 깊은 곳, 나는 해수관음상 앞에서 조용히 두 손을 모은다. 비좁은 법당에서 절을 하는 사람, 원효스님의 좌선대 위로 재미 삼아 동전을 던지는 사람, 무언가를 염원하는 마음은 같을지 모른다. 그러나 관광지가 되어버린 향일암의 인기가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은 살아가고 세계는 바쁘게 움직인다. 생각에 잠겨 있는 나를 잡아끄는 것이 있다. 하나의 뿌리에서 나와 후박나무와 동백나무로 살아가는 사랑나무, 연리근이다. 아프고 힘든 날이 많아도 서로 존중하며 살아가는 한 쌍의 나무, 각자의 정체성을 지켜가며 한 뿌리로 살아가는 부부 같은 나무다. 다른 둘이 만나 조화를 이루고 균형감각을 잃지 마라는 연리근의 속삭임이 들린다.

 

▲ 조낭희<br /><br />수필가
▲ 조낭희 수필가

힘들 때마다 버팀목이 되어주는 남편이라는 존재와 그 자리의 중요성을 생각하니 가슴이 싸하다. 살며시 남편의 손을 잡자 가슴 속에 훈풍이 분다. 무거운 바위를 짊어지고 바다로 향하는 거북이 형상의 금오산이 살아 움직일 것만 같다. 뒷다리를 힘 있게 밀며 저 넓은 대해로 헤엄쳐 나갈 듯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바위 틈에서 촉수처럼 살아 움직이는 나무들의 침묵, 겨울에도 깨어서 꽃을 피우는 동백의 노고가 염불소리에 섞여 가슴을 적신다.

우리는 손을 꼭 잡은 채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석문을 통과하여 향일암을 빠져 나왔다. 일곱 개의 돌문을 모두 통과해야 소원이 이루어진다는데 산 위에 있는 석문 하나는 남겨 두기로 했다. 살다가 털썩 주저앉고 싶어지는 날이면 진지하게 나를 돌아보며 마지막 돌문을 통과해 보리라. 어둠을 뚫고 돌아오는 길, 여전히 차 안에는 음악이 흐르고 안온함으로 출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