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명과 삶에 자비를

▲ 겨울 안개로 둘러쌓인 성주 선석사.<br /><br />
▲ 겨울 안개로 둘러쌓인 성주 선석사.

삶은 맑은 날이 지속되는 걸 지켜봐 주지 않는다. 가끔은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단내가 나도록 오열케 하고 반성할 기회를 안겨 주는 게 삶의 매력인지도 모른다. 무겁고 우울한 마음으로 맞은 아침, 또 비가 내린다. 참 구슬프게도 내린다. 하지만 어김없이 짐을 챙겨들고 우중의 산사기행을 나설 수밖에 없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준 친구와의 동행길에 겨울비는 추적추적 쉬지 않고 따라온다. 작은 연못이 있는 식당에서 수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숱하게 밀려오는 생각의 고리를 끊고 대화를 나눈다. 거침없이 수직으로 하강하는 빗줄기처럼 단순하게 살다갈 수는 없을까. 소소한 풍경들이 쉼표가 되어 마음을 달래 준다.

선석사 가는 길은 한적하다. 겨울 안개가 들길을 헤맬 뿐, 거리도 마을도 유령의 도시처럼 적막하다. 몇 번이나 네비게이션을 확인하는 동안 한기를 느낀다. 들길이 끝나고 비탈길을 오르자, 텅 빈 주차장 너머로 수령이 오래된 겨울나목이 처연하게 산사를 지킨다. 잎을 떨구고도 의연한 기상으로 품격을 밝히는 고목 몇 그루가 있어 겨울 산사는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선석사(禪石寺)는 신라 효소왕 1년(692년)에 의상대사가 화엄십찰 중 하나로 창건하여 신광사(神光寺)라 하였다. 고려 공민왕 10년에 나옹대사가 원래 서쪽에 있던 절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당시 새 절터를 닦는데 큰 바위가 나왔다고 하여 닦을 선(禪) 자를 넣어 선석사라 하였는데 지금도 대웅전 앞뜰에 바위의 머리 부분이 보인다.

선석사는 세종의 왕자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로 지정되어 영조로부터 어필을 하사받은 이색적인 사찰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왕자 태실은 남아 있지만 어필각은 화재로 소실되고 영조 어필의 병풍만 정법료에 보관되어 있다. 대웅전 법당문은 한파를 이기기 위해 비닐 방한복을 입고 월동 준비를 끝냈는데 절간은 썰렁하다.

규모가 큰 태실법당의 문을 열자, 아기를 안고 가슴을 드러낸 자모관세음보살상을 중심으로 작은 놋 항아리들이 빼곡히 정렬되어 있다. 태를 봉안하고 기도하는 태장전이다.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풍요와 다산의 여신을 보는 것 같다. 숯과 고추, 생솔가지 등으로 만든 금줄로 탄생의 기쁨을 신성하게 여기던 옛 풍습이 떠오른다. 동네에 금줄이 쳐지면 어머니는 무슨 큰일이나 날듯 함부로 들어가지 말기를 누누이 당부하셨다. 그래서인지 새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금줄은 내게 환희와 축복보다는 신령스러운 두려움으로 먼저 다가왔다.

혼돈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신비로운 터널, 모체로부터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해 주고 완벽한 생명체를 만들기까지 긴 침묵의 시간을 떠올리며 삼배를 올린다. 그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류를 향한 기도이기도 하다. 나는 생명의 존귀함만큼 삶을 진실하고 겸허하게 살아 왔는지 반문해 본다. 한 차례 가슴에 통증이 지나간다. 대웅전은 단청이 벗겨지고 퇴색되어도 고색창연한 기품을 유지하고, 태실법당 앞의 커다란 느티나무 두 그루도 말이 없다. 뿌연 안개가 절을 에워싸고 적당히 시야가 흐린 날, 선석사의 모든 것은 생명을 위해 기도 중이다.

생명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생명이 잉태되고 신성한 의식이 깃드는 일은 참으로 경이로운데 죽음을 생각하면 여전히 허무하다. 인도의 젖줄이자 성지인 갠지즈 강가에서 숨을 죽이며 지켜보았던 삶과 죽음의 광경이 떠오른다. 남루하게 펼쳐졌던 삶과 바라나시의 화장터에서 시체를 태우던 역겨운 냄새들, 삶의 허무함 앞에서 온 종일 속이 매스껍고 두통이 심해 나는 아무것도 먹질 못했다.

하지만 에너지가 모이는 신체의 중심점 차크라를 인도 여행에서 접하게 된 후 나는 삶과 죽음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생명과 인간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고, 명상을 통해 욕망과 에고의 근원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끊임없이 들끓는 감정과 욕망들이 나를 가만 두지 않았다. 우산을 쓰고 선석사 경내를 돌며 여전히 감정의 노예가 되어 있는 내면을 들여다본다.

가슴이 답답하다. 그런 날은 꿈을 꾸고 싶지도 않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며 모처럼 성가를 듣는다. 명상법보다는 훨씬 쉽고 간편한 치유책이다. 가슴으로 사랑과 자비를 호흡한다. 서서히 몸과 마음이 편안해져 오는 것을 느낀다.

 

▲ 조낭희 수필가
▲ 조낭희 수필가

“내게 주어진 하루를 감사합니다. 내게 또 하루를 허락하심을. 이 하루도 헛되이 보내지 않으며 살기 원합니다. 이런 은총 받을 만한 자격 없지만 주의 인자하심 힘 입음으로 이 하루도 내게 주어졌음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이 하루도 정직하게 하소서. 이 하루도 친절하게 하소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이 하루도 온유하게 하소서. 이 하루도 겸손하게 하소서. 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이들에게 용서를 베풀게 하소서. 행복을 빌게 하소서. 축복을 베풀게 하소서.”(다윗과 요나단 `오늘 이 하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