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무렵, 우리는 광복과 함께 남북 이념대결로 6·25의 싹을 키우고 있을 때, 아르헨티나에서는 페론주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불우한 어린시절을 지나 여배우로 인기를 얻어가던 24세의 에비타가 상처(喪妻)한 40세의 후안 페론 대령을 만나 에바 페론이 됐고, 후안 페론은 46년 2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남미의 맹주였다. 2차세계대전으로 태평양 서쪽 지역 국가들이 식량난에 허덕일 때, 광활한 토지와 막대한 곡물을 가진 아르헨티나는 이를 수출해 엄청난 돈을 벌었다.

페론 부부는 이 돈으로 `페론주의`를 만들었다. 노동자, 여성, 빈민에게는 모든 것이 무료였다. 재난을 당한 주변 여러 나라에 아낌 없는 지원도 했다. 매일 매일이 `막 퍼준데이`였다. 당시 패전국이었던 일본도 페론의 돈을 얻어 썼다. `페론병원`이라 써붙인 진료차를 전국에 돌려 무료진료를 했다. 이를 주도한 사람이 아내 에바 페론이었고, 그녀는 `가난한 자들의 성녀`가 되더니 곧 `아르헨티나의 구세주`로 불리었다. `에바 자서전`을 스페인어 교재로 썼고, 초등학교는 매주 페론 부부를 찬양하는 글짓기를 했다.

에바 페론은 유방암으로 8년후 세상을 떴고, 후안 페론은 12년 집권을 끝으로 물러났지만, `페론주의`는 깊은 뿌리를 내렸고, 그것이 결국 나라경제를 거덜내면서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하게 됐다. 이달 23일에 치러진 대선에서 아르헨티나는 “페론주의와의 결별`을 고했다. `우파 대통령`을 뽑은 것이다. 노동자들도 기업인 출신의 마크리(56) 후보를 찍었다. 가난은 깊어가고 일자리는 줄어들다가 마침내 굶주림만 남은 포퓰리즘 정책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마우리시오 마크리 당선자는 자동차회사 사장도 했고,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장도 지낸 `경영인 겸 행정가`였고, 이번 대선에서 “바꾸자!”란 단 한 마디 구호로 승리했다. 인기영합주의를 종식시켜 `공짜의식`을 없애고, 자유무역을 확대하는 개혁 개방의 길을 간다. 중남미에 우풍(右風)이 거세다.

/서동훈(칼럼니스트)

    서동훈(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