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경제가 동력을 잃고 있는데, 국회는 정쟁으로 나날을 보내고, 청년들의 절망감이 심각한 지금, 아산(峨山)의 “이봐, 해봤어?” 정신은 큰 용기를 줄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성공한 기업인으로만 기억하지만, 사실상 그는 많은 실패와 곤경을 겪었다. 다만 그는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는 점이 달랐다. 토마스 에디슨이 100번을 실패하고도 “나는 안 되는 방법을 100개나 알고 있다”고 했던 도전정신을 아산도 가지고 있었다.
22세때 쌀가게를 열었지만 일제가 배급제를 하는 바람에 망했고, 자동차수리공장은 한 달 만에 불이 났다. 1953년 대구에서 고령교 복구공사를 따냈지만 악성 인프레 때문에 빚만 져 일가족의 집 4채를 팔았고, 그 빚을 갚는데 20년이나 걸렸다. 초등학교 학력으로 사법고시에 도전하기도 했다. 한밤중에 혼자 차를 몰고 조선소를 순찰하다가 바다에 빠져 죽을뻔한 일도 있었고, 장남을 교통사고로 잃기도 했으며, 92년에는 대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고 한동안 세무조사에 시달렸다.
1971년 허허벌판 백사장 사진 한 장과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 짜리 지폐 한 장을 들고 세계적인 선박컨설팅회사 사장을 찾아가 거액을 빌린 이야기는 유명하다. 열사의 땅 중동 진출때, 직원들이 들고 온 보고서는 온통 “안됩니다” 일색이었다. 아산은 “안 되는 방법만 적어왔구먼”이라고 했다. “안된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방법만 나오고, 된다고 생각하면 되는 방법이 나온다”란 명언이 여기서 나왔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했다. “유조선으로 식수를 싣고 갔다가 석유를 싣고 옵니다. 모래는 여기서 가져가면 됩니다. 중동은 너무 더우니 낮에는 자고 밤에 일합니다” 그렇게 중동에 진출, 75년부터 79년까지 51억6400만 달러를 벌었다. 당시 우리나라 1년 예산이 50억 달러 미만이었다.
84년 충남 서산 간척지 최종 물막이 공사때의 일화도 유명하다. 양쪽에서 물을 막아오다가 마지막 남은 곳을 막아야 하는데, 이 곳의 물살이 대단했다. 바위덩어리가 물살에 떠내려갔다. 다들 “포기하자”고 했을 때 아산은 걸프만에 있는 폐유조선을 예인선 2대로 끌어와 그 물살을 막았다. 이를 두고 뉴욕타임즈는 `정주영 공법`이라고 세계에 소개했다.
아산이 인천항 하역노동자로 일할 때 터득한 `빈대 경영철학`도 유명하다. “빈대도 저렇게 머리를 써서 기발한 방법을 찾아내는데, 인간의 머리가 뒤질 수 없지” 그래서 그는 남들이 안 된다 할때 되는 방법을 궁리했고, 그것은 대부분 적중했다. 아산 탄신 100주년을 맞아 젊은이들이 본받아야 할 정신이 바로 이것이다.